갈라디아서 3:23-29 주석

렉셔너리가 본문의 시작과 끝을 선택하는 방식은 때로 당혹스럽습니다. 또한 황당하기도 합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도 그렇습니다. 본문 23절-25절과 26절-29절 사이의 간격은 건널 다리가 없는 Grand Canyon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NIV 성경은 이 구절들을 (마지못해 한 것처럼 성의 없이) 제목을 붙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설교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본문의 전반부나 후반부만 선택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분명하게 통합되지 못한 두 본문 모두를 설교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3-29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큰 차이는 주제에 대한 것만 아니라, 이 사이에 다소 은유적인 면도 있습니다. 25절과 26절의 간격은, 결과적으로 볼 때,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믿음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 만큼이나 거대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일종의 교도관처럼 규정하지 않습니다.(23절) 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제정하신 것처럼 규정하지도 않습니다(24절). 두 번째 주장은, 사실, 그들에게 불쾌감을 줍니다. 율법은 유대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의 감독 아래 있지 않다고 고백하지만(25절), 유대인들은 율법을 그들의 감독자로 여깁니다.

아내와 저는 굶주린 이웃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많은 정통파이며 보수파인 유대인들과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물질적으로 취약한 이웃들을 돌보는 일에 있어서 많은 유대인들과 잘 알고 지내게 되었고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보수파 유대인들과 일종의 유대감을 느꼈습니다. 그들도 성경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이 오직 구약성경과 그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에 따라 살아가는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하겠다는 약속을 공유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 이웃들과 많은 것을 공유하면서도 율법의 역할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공유하지 않습니다. 보수파 유대인들은 토라를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이 포함 된, 갈라디아서 전체는 예수님의 친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렉셔너리는 원래 갈라디아서 3:23-29 말씀을 오순절 후 다섯 번째 주일 서신서 본문으로 지정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11-24 말씀과 2:15-21 말씀 다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유감스럽게도,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이 렉셔너리의 C년 일정에서 제외됐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꽤 촘촘하게 짜여진 편지 중간 부분에 놓이게 됐습니다.

갈라디아서 2:16의 생략된 본문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핵심입니다. 그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라고 썼습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은, 그러나, 적어도 일부 갈라디아 교회 지도자들이 의롭게 되는 믿음에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고 음식 규례를 지켜야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포함시키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율법의 역할을 매우 다르게 보았습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는 일종의 ‘전후’ 시나리오를 설명했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선물로 주시기 전에 율법에 몇 가지 기능이 있었습니다(23절).

율법은 하나님이 사랑하신 백성들을 가두는 일종의 감옥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23절). 바울이 율법에 “갇혔느니라”라고 한 것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 의미를 추측해야 합니다. N. T. Wright은 Galatians, Eerdmans, 2021, 237쪽에서 고대 세계에서는 감옥이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당국이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의 처리 방법을 결정할 때까지 가두는 장소”였다고 지적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대한 언급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려는 의도가 바로 이 점이었다면,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살고 죽으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두신’ 장소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오실 때까지 일종의 보호 감금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이 24절과 25절에서 율법을 “초등교사”(padagaigos; 참고. 개역개정에서는 ‘초등교사’; NIV에서는 ‘guardian’; 이 글에서는 ‘supervisor’로 되어 있음)로 언급한 것은 21세기 독자들에게는 좀 더 명확해 보입니다. NIV은 24절과 25절에서 이를 “guardian”으로 번역했습니다. N. T. Wright은 같은 책에서 원문 단어인 padagaigos는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등교와 하교를 하게 하는 일을 하는 노예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 역할을 어떤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아이를 돌보는 ‘보모’(babysitter)의 역할과 비교합니다. ‘초등교사’들은 종종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아이들을 돌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더 이상 자신을 돌보는 토라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말씀하신 그리스도가 오셨고, 성령도 오셔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 사이에 믿음이라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은 토라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적어도 일부 유대인들은 율법이 유대인만을 위한 초등교사라는 것으로 이해했고, 지금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유대인이 율법을 일정한 정도 이상 지키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토라는 이런 식으로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가르는 일종의 구분선 역할을 합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믿음이 무너뜨린 장벽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 안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물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세례의 위협적인 물로부터 그리스도의 고난과 동일시되는 새로운 삶과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순종의 삶으로 올라옵니다.

그 결과 세례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옷 입지’ 않습니다. 세례 받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노예와 그 노예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남성과 여성으로 서로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성서학자인 Elizabeth Johnson은 “바울은 인간의 어떤 범주가 우리를 설명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정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기울임체 추가). .. 모든 인간의 범주는 종속적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우리의 기본 정체성과는 무관합니다.”라고 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로 만드셨습니다(28절).

이번 주일 북미의 맥락에서 본문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은 인종 문제에 민감한 문화 속에 있습니다. 일부 청중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 다양한 인종과 민족 집단의 구성원 간의 구별과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3장의 설교자들은 이 점을 기도하면서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몇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양한 인종과 사람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해를 끼쳤는지 고백하고 애도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줍니다.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들이 때때로 갈라디아서 3:28 말씀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실천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더 나아가, 설교자들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반문화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부색과 언어와 성적 정체성과 정치와 같은 것에 근거해서 편을 가르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보다 다양하고 통합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 된 이들이 자신의 고유성만큼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것을 축하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초대합니다.

또한, 설교자들은 N. T. Wright(같은 책)이 그랬던 것처럼 “메시아의 가족 구성원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범주 중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게 됩니다. 바울은 인종적 구분과 사회/경제적 구분과 성별의 구분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는 단순하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은혜롭게 행하신 일 때문에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법을 따르는 것으로는 아무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법을 따르는 것은 질서 있는 사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Savage Continent: Europe in the Aftermath of World War II라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저자인 Keith Law는 1945년 이후 유럽 사회의 붕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법과 질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경찰력과 사법부가 부재했기 때문입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사람들은 소유권과 상관없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스스로 취했습니다.”

“그것을 소유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자들과 기꺼이 목숨을 걸고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자들만 물건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무기를 든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빼앗았고, 방해 되는 사람은 누구든 위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