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 관찰, 그리고 질문들
성경 원어에 대한 지식이 그리 많지 않은 설교자들도 훌륭한 헬라어와 히브리어-영어 직역 성경을 참고하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영어 성경 번역본은 때때로 성령께서 성경 원어에서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부분을 모호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번 주일 서신 공과는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의 좋은 예입니다.
본문 9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 중 일부가 했던 것처럼 주를 시험해서는 안됩니다”고 적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에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감당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험’과 ‘유혹’이라는 개념이 서로 비교적 가깝다고 느낄 수 있지만, 두 단어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헬라에서 이 두 단어는 페이라조라는 공통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NIV 성경은 9절에서 ‘시험’으로 번역한 단어는 에크페이라조멘입니다. 13절에서 ‘유혹’으로 번역한 단어는 페이라스떼나이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0장은 비록 야고보서 1:13에서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당하지 않으신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하나님과 그의 백성 모두 어떤 종류의 ‘시험’을 겪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듯 합니다.
이것은 이번 주일 서신 공과 설교자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이 시험에 반응하는 방식의 차이를 탐구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죄성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인류의 절박함도 보여줍니다.
신약 학자인 쉬블리 스미스는 이번 주일 서신 공과가 고린도전서의 “질문-답” 섹션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다소 아이러니하게도) 이 본문은 8장과 10장 15절 이후에서 바울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샌드위치” 의 “고기” 부분에 해당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비록 유혹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유혹에 철저히 실패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창의적으로” 사용합니다. 대신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관대하심과 그들의 감사하지 않는 태도를 크게 강조합니다. 우상에 바쳐진 음식을 먹는 문제를 다루는 “샌드위치 빵” 맥락에서 감사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하나님의 관대함을 다루는 본문의 묘사가 종종 음식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합니다.
본문 3절과 4절에서 사도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지 음식과 물만을 제공하지 않으셨음을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은 또한 “신령한 음식을 먹었고, 신령한 물을 마셨는데,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습니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3-4절)고 말합니다. 그 영적인 복의 정확한 의미는 선명하지 않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유대인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육체적, 영적 관대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관대함은 하나님이 은혜롭게도 자신의 백성의 삶에서 각자에게 매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주석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관대하셔서 우리에게 매일 새로운 날을 주실 뿐만 아니라 선하고 중요한 일을 주십니다. 하지만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 하나님께서 온 피조물을 위해 보여주신 비범한 관대함을 가장 충만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 노예와 미래 약속의 땅 사이에 있는 광야에서 피난민이었던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관대하심은 독보적입니다. 하지만 5절에서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대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흩어졌다”고 슬퍼합니다.
이번 주 서신 공과를 설교하는 사람들이 유혹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6절과 11절 두 번에 걸쳐 사도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기를 의도하셨다고 강조합니다.
본문 7절-10절에서 바울은 거의 북소리처럼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들 중 몇 사람이 한 것처럼 … 행하지 마십시오.” “그들 중 몇 사람이 했던 것처럼 우상숭배자가 되지 마십시오”(7). “우리는 그들 중 몇 사람이 했던 것처럼 음행하지 말아야 합니다”(8). “우리는 그들 중 몇 사람이 했던 것처럼 주를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9). “그들 중 몇 사람이 했던 것처럼 원망하지 마십시오”(10).
고린도전서 10장은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반응과 닮아 있는지를 청중과 함께 성찰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떻게 이스라엘이 직면했던 우상 숭배와 성적 부도덕함에 쉽게 무너지는지, 그리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교훈을 얻지 못한채 반복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시험했을 때, 하나님께서 징계로 반응하셨다는 점을 사도는 분명히 밝힙니다. 이스라엘이 관대하신 하나님을 감사없이 시험하여 죽음을 초래하는 길의 결과를 겪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영향을 제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수히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고통당하고 죽게 내버려두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겪었던 고통과 죽음의 방식만으로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은혜와 생명으로 우리의 잘못된 길에 대해 반응하십니다. 예를 들어, 전염병은 수천명의 성적 부도덕한 이스라엘 백성을 죽게 만들었습니다(8). 하지만 그들 중 한 명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전염병을 멈추게 하셨습니다(민25:8). 하나님께서는 한 명의 죽음으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셨습니다.
게다가, 9절에서 사도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독사를 보내셔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언급합니다(민21:4-9).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은혜롭게도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일종의 “울타리”를 쳐주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둥 위에 놋뱀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뱀을 쳐다볼 때 그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시험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들의 반역의 결과로 고통을 겪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심지어 그들이 고통을 당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그들에게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죽음 앞에서 계속해서 생명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에게 같은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유혹을 잘 이겨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에 우리는 자주 무너집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이스라엘이 빠졌던 유혹에 넘어갈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약한 자를 학대하며, 우리의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유혹에 넘어갑니다.
하지만 인류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분노하게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신실하심을 지키십니다. 1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유혹에 저항하도록 하심으로 죽음 한가운데서도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는 방식을 묘사합니다. 그는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유혹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주셔서 그것을 견뎌내게 하십니다.(강조 추가)”
여기에 또다른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유혹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식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유혹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또한 악한 자가 시험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일종의 요새를 주십니다. 그의 형상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아십니다. 사실, 악한 자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악한 자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깊이 그를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얼마나 유혹할 수 있는지를 아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정도로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지도 아십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놀라운 소식을 다음과 같이 의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결코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악한 자가 교활하고 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롭게도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사탄의 능력에 한계를 주셨지만 사탄은 여전히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또한 피할 길을 주십니다”(13절).
사도는 피할 길의 의미를 완벽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악한 자가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과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선택지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14절에서 “우상을 피하라”고 한 내용이 그런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때때로 악한 자는 예수님에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유혹하는 일에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직접 악한 자의 유혹으로부터 물러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화
말콤 기트는 그의 책인 광야에서의 말씀의 “돌을 빵으로”란 그의 매력적인 시에 대한 주석에서 선한 것을 오염시키려는 우리의 유혹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그는 창의적으로 광야에서의 예수님에 대한 세 번의 유혹을 서로 연결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과도 연결합니다.
기트는 우리 “자신의 욕망과 필요”가 만들어내는 유혹에 관해서 이렇게 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락함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다른 이들의 필요를 생각하기도 전에 자신의 집착과 중독을 더 중요시 여기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몸의 욕망을 채우는데에 그치지 않고 자아 중심적이고 권력욕에 사로잡히며, 세상을 지배하려는 더 깊은 욕망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첫 번째 유혹을 이겼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사실 두 번째 유혹에 사로잡혀 그것에 끌려다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이어트를 하고, 체육관과 헬스 클럽에서 몸을 단련하며, 개인 트레이너와 3개월 피트니스 계획을 따라 운동을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 세상에서 빛나고 성공하기 위해 우리의 이미지를 좋게 하려는 바램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1-13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