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ott Hoezee는 내가 이 글을 쓰는 데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던 이 본문에 대한 그의 탁월한 설교 주석에서 일부 복음 선포자들이 그런 것처럼 교회 안에서 그리고 기독교인 주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에 위험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 기독교가 우리에게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공과에서 바울은 기독교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사실을 암시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그는 복음의 메시지가 적어도 어떤 사람에게는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음’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사도는 본문의 일곱 구절에서 “어리석다”는 단어 형태를,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씩이나 사용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리석다” 또는 “어리석음”으로 번역하는 단어의 그리스어 어근은 ‘moros’입니다. 이 단어는 또한 우리가 때때로 화를 내거나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영어 단어 “moron; 바보”의 어근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가 당연히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는, 감히 말하건 데,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된 자녀들에게는 십자가 복음이 어리석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은혜롭게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음이 참 되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 메시지가 인류의 모든 능력과 지성과 지혜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은혜롭게 설득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장 18~25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과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이 이 내용으로 새로운 한 주간을 산다면, 그 내용이 자연적으로 어리석게 보인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Hoezee의 이미지를 빌리자면, 복음을 읽는 것은 자동차 대리점에 들어가 매력적인 자동차를 발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차에 앉아 라디오를 켜 보고, 좌석을 앞뒤로 움직여 보고, 시승도 해 봅니다. 그리고 나서는 발길을 돌립니다. 그 차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를 일종의 고대 시대의 뉴욕이나 토론토로 생각할 수 있고, 그 도시의 시민들을 영적인 “시운전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는 다양한 전통과 언어가 모이는 일종의 교차로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시민들은 돈으로 상품을 교환하듯 사상을 교환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다양한 종교라는 “자동차”를 ‘”시운전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이지 않지만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21세기 서구 사회를 매우 친근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화는 사상과 철학과 종교의 벼룩시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맞는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습니다. 서구인들은 또한 피부의 각질을 제거하듯 사상과 종교를 종종 없애 버리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호기심 많은 고린도 사람들에게는 복음 전체가 완전히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중범죄자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전한다는 것은 고린도인의 지성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거친 일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라는 개념은 바울과 그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도 그다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하나님이 다시 오실 길을 준비할 수 있는 누군가 살아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따라서 메시아는 이교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복음의 전체적인 개념은 현학적인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에게만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던 것이 아니라, 평범한 고린도 사람들에게도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그들은 고난이 닥쳤을 때 자신들을 지켜주고 도와줄 수 있는 합리적인 신을 찾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고난 당하는 바울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저버린 그 신을 그들에게 제시한 것입니다.
복음 전체는 고대 고린도에서보다 우리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조금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우리가 살기 위해 누군가가 죽어야 했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요?”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이웃과 동료와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복수의 신이 어떤 종류의 복수를 요구할지 궁금해 합니다. 사실, 기독교인들조차도 때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에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로 변화시켰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몇몇 선의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복음의 “어리석음”에 대해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사려 깊은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우리와 이 시대 사람들의 구미에 맞도록 포장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 복음 전파자들은 예수님을 기본적으로 선한 도덕 교사로 축소하여 복음을 더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철학자 Soren Kierkegaard가 한 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에서 충격을 주는 능력을 제거하면 기독교는 완전히 파괴된다. 그러면 그것은 깊은 상처를 입히지도 치유하지도 못하는 보잘 것 없고 피상적인 것이 되고 만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아는 가장 똑똑하고 세련된 사람들과 이 어리석게 보이는 것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어리석음을 충실히 받아들인 고린도 사람들 중 고린도에서 “가장 똑똑하고 최고”인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은 이웃들이 무시하고 착취하는 사람들이었고,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린도의 기독교인들은 그 시대 사람들이 “바보”로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바보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복음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서로를 고소하거나 주님의 식탁에 함께 앉기를 거부했고, 또 자신이 다른 교인들보다 더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27절에서 “그러나 하나님은…”이라고 말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내용이 이번 주일 서신서 공과에는 포함되어 있 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그가 인간의 고질적인 문제를 설명할 때 즐겨 사용하는 문구 중 하나로,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개입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생각은 당연히 문제 있고 어리석은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 죽음을 통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어 보이는 그것을 은혜롭게 변화시키시고,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받게 하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그들을 “중요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셨다고 그는 덧붙입니다. 세상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진짜로 중요한 사람들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고린도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선택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선포를 통해 그들을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보잘 것 없는 고린도 사람들을 하나님의 양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공과를 선포하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비천한 지위에 대해 다룹니다. 그 사회에서 가장 현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분은 낮지만 능력이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모든 이웃과 동료와 친구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미신적인 사람들로 생각하거나 극단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믿는 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옷차림이나 학업 성적이나 친구 선택에 있어서 때로 어리석게 생각했던 중학교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당연히 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하거나 최소한 용납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 더 나아가 주님에 대해 “자랑하지” 않으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경멸과 관련된 자연스러운 반응은 가능한 한 우리의 믿음을 숨기려 하는 것이며, 마치 우리가 사과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주저하듯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역 교회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신실한 참여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우리 문화가 기독교(와 기독교인)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볼 때, 하나님의 양자 된 우리는 하나님과 동료 기독교인들이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계속해서 상기시켜 줄 수 있는 말들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리석게” 계속 따르도록 격려해 줄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자녀라고 말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과 인내가 넘치는 방식으로 어리석은 복음을 계속해서 전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줄 다른 기독교인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아무리 지혜롭고 똑똑해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기독교인의 사고 방식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기독교는 기독교인에게는 이해가 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지성인의 삶을 살았던 C.S. Lewis 조차도 자신의 변화를 성령의 역사로 돌렸습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공과를 선포하는 이들과 듣는 이들 모두 깊은 사랑과 겸손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을 사람들과 나누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점점 더 많은 이웃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살기 위해 주님과의 건강한 관계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문화가 내는 소리보다 하나님의 소리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는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를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 달려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창시자 Ellen White에 대한 Ronald Numbers의 전기가 Prophetess of Health: A Study of Ellen G. White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 책에 그는 예수님이 William Miller가 예언한 날짜에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White와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깊은 실망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사람들의 일부가 실망감 때문에 스스로 생을 저버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New York Lunatic Asylum 원장은 1844년 10월 22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실망감으로 32명이 미쳤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신 질환과 종교를 연관 짓는 것이 21세기 기독교인들에게 구시대적이고 어리석은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민수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9세기 미국 정신과 의사들은 과도한 종교적 열심이 정신 질환에 걸리기 쉬운 사람들에게 광기를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8-25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