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서신서 공과에서, “아내가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살라”고 하신 말씀이 선포하기에 어렵게 느껴졌다면, 이번 주일 공과가 다루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는 문제는 당혹스럽습니다. 사실, 바울은 이 주석서를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끄는 교회보다는 아프리카나 아시아 교회에 더 많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사도 시대의 사람들은 우상 신전에 바쳐진 고기를 먹지 않고는 지낼 수 없는 헬라 도시에 사는 이들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종종 우상에 바쳐진 남은 고기를 시장에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시장에서 고기를 사왔을 때에는 이미 신전에 바쳐진 후였습니다.
게다가 바울 당시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이 먹는 음식을 통해 악마와 악령들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악의 세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신들에게 모든 음식을 바침으로 그러한 오염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떤 이들은 희생제물로 바쳐진 고기에 어떤 낙인도 붙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신들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을 거짓 신들을 믿는 행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짓 신들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행위가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행위를 하나님이 진짜 싫어하시는 거짓 종교와 타협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이 대부분의 북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믿음이 강한 신앙인들이 믿음이 약한 신앙인들과 함께 기독교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한 동료 목회자가 들려준 보다 현대적인 이슈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그 이슈에 대해 생각해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네온 불빛으로 뒤에서 비춰지는 투명한 예수님 그림을 걸어놓았습니다. 그것은 많은 농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회 행사가 끝나면 사람들은 종종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꺼주세요”라며 불을 끄라고 요청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교회는 그림을 감상하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림을 철거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 또는 사랑의 행위였나요? 그것은 교회 공동체를 세웠나요? 아니면 허물었나요?
오늘날 북미 그리스도인들을 크게 분열시킨 문제들 중 일부는 정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특정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저항할 때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을까요?
고린도전서8장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계속 관심을 기울여야 함을 상기시켜 줍니다. 물론 처음에는 바울이 이 문제를 아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구호를 함께 묶어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의 신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에 염려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싶은 유혹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먼 친척이 불쾌하게 행동했던 대가족 크리스마스 파티를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정식 교육을 받은 이 사람은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제 사촌이 쓰레기 운반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비하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조지의 지식은 적어도 데이브의 기를 꺾는 방식으로 그를 부풀리게 만들었으며, 결국 데이브가 우리 가족 크리스마스 파티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데에 24시간이 넘는 6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기독교 신앙의 기본으로 삼는 사람들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중 일부가 주일에 외식하는 것이나 술을 마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문제라고 ‘알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는 ‘근본주의자들’을 향해 잘난척하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약한’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한 그들의 염려를 무시하는 듯 보였지만, 그는 그들의 우려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사도는 이러한 우려를 분명한 기독교적 맥락에서 설명합니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지혜나 기독교인의 자유가 다른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하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는지 확신하고 우리가 모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상대적으로 비본질적인 문제가 더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 지점에 도달했다면 정말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스스로를 지혜롭거나 강하다고 생각할 때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질 것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이시기에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강함이 믿음이 약한 신앙인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강함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신앙을 해친다면 그것은 결국 저주가 되고 말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우리 구주께서 은혜롭게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살려낸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오만함으로 인해 그들의 믿음이 손상될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특정 문제로 인해 기독교 신앙에 타격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면 그들의 믿음이 무너질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에 대한 우리의 통념에 도전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강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강한 의견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믿음이 가장 약한 사람이 바로 신앙의 실천에 대해 가장 강한 의견을 가진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자급자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힘에 대한 우리의 관점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꾸준히 자신의 두 발로 서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분류할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강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약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그들은 우리의 문화를 감염시키는 ‘일등만 바라보는’ 태도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사람의 한계에 굴복할 수 있는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어떤 동료가 지적했듯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작은 영적 정원을 가꾸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적 번영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사랑은 때때로 힘, 지식, 그리고 자심감에서 오는 오만함에 대한 바울의 해결책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게 자신의 모든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가장 작은 아이부터 천문학자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이것을 인지할 때, 우리는 강한 그리스도인과 약한 그리스도인 모두를 형제와 자매로서 동등하게 대할 수가 있습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사람들이 이미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또는 일요일에 외식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등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예배 스타일이나 한 가지 정치적 관점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일들이 다른 사람의 믿음을 무너뜨린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토론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최우선적으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대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따라서 특히 21세기 북미의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하세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하지 말고 기독교인의 자유가 허용한대로 무엇이든 하세요”라고 말하길 기대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물론 하나님은 당신에게 많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견디기 힘든 문제들을 다룰 때에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책임을 그들의 필요에 맞게 기꺼이 조종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저는 바울이 정치적 관점과 같은 문제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주요 질문을 제시합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요? 어떤 행위가 기독교 사랑에 합당한 것인가요? 사도 바울은 어느 쪽이 ‘이길 것인가’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어려운 문제들 다룰 때에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다음의 것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은혜롭게 죽으신 이들을 위한 것이냐고 말입니다. 우리는 민감한 사안을 투표로 결정하기 보다는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가장 사랑스러운 과정이라 해도 항상 완전한 합의로 끝나거나 상처받은 감정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들을 기독교 사랑으로 다룹니다.
이번 주일의 서신 공과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알기가 항상 쉬운 것은 아닙니다. 결국 특정 행동 방침이 맹백히 옳다면, 일부가 승인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또한 솔직히 말해서, 모든 공격이 누군가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사랑으로 행동하지 않고 공격하겠다는 협박으로 강한 사람을 인질로 잡기도 합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해서, 35년 가까이 기독교 사역을 해온 지금, 저는 누가 믿음이 강한 사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바울이 저를 믿음이 강한 사람으로 여길지, 약한 사람으로 여길지조차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항상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배려하며 행동하도록 말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제가 “에드”라고 부르는 사람은 제가 만난 어느 누구보다도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 가장 강한 의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일 성수와 교회 내 여성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철저히 고수했습니다. 에드는 제가 목회했던 교회의 일들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가지고 저를 공격했습니다.
나는 항상 에드를 바울이 ‘강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에드가 도덕적인 면이 아닌 신앙적인 측면에서 바울이 말한 ‘약한 사람’에 속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에드는 제가 항상 기독교인의 자유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상당히 큰 불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에드를 경멸하는 태도로 대하지 않도록 은총을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8:1-13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