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나를 사랑하시니, 주 나를 사랑하시니, 주 나를 사랑하시니 정말 기뻐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신성한 복은 얼마나 광대한가!”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우리는 교회에서 늘 이러한 우리 중심의 감성을 노래합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을 전형적인 영적 악인으로 보기 전에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어떻게 보는지–또 다른 이들은 어떻게 보는지—신중하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상상해 보십시다: 추수 감사절에 식구들이 다 함께 칠면조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하는 당신의 할머니가 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오 하나님, 우리가 아는 다른 가족들, 하나님을 알지도 감사하지도 못하는 사람들, 뿔뿔이 흩어져서 더 이상 식탁에 모이지 않는 가족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모든 선한 것들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모든 사람들이 감사해야 하는 당연한일을 위해 우리가 오늘 아침에 교회에 가서 예배드릴 수 있었음도 감사합니다.”
여기서는 악역의 바리새인이 아니라 순진하게도 느껴지는 할머니입니다. 할머니의 기도가 바리새인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니면 아무 것도 그 오류로부터 그것을 지켜주지 못합니까? 똑같은 실수가 또 반복되나요? 언제 어떻게 감사가 나빠질 수 있고,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를 처음 듣던 사람들에게 이 비유에는 크게 놀라운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마지막에 가서 의롭다 여김을 받고 돌아간 이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라고 말씀하실 때까지는 별로 이상한 것을 감지하지못하였습니다. 그때까지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단순히 경건하게 비추어 졌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바리새인의 기도가 기도를 풍자화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표준적인 감사 기도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제안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이들에게 이 기도는 우리에게 친숙한 주기도문 처럼 퍽이나 친숙한 기도였을 것 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히 옳고 합당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도 그 자체보다 기도를 하는동기와 태도와 관련이 있고, 그것이 바로 비유의 핵심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감사했다기 보다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갖는 감사함을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의 삶과 우리 삶을 비교하기 시작하는 순간, 초점이 우리가 하는 일,행동하는 방식, 이뤄내는 성취가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형태, 그리고 우리 삶에 그러한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참여하는 수많은 활동이 삶을 평가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잊어버리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늘 균형을 잡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몇가지 질문들을 생각해봅시다: “기도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깊은 의미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겠죠? 또 우리 지역 사회의궁핍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역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기뻐해야 하겠죠? 인생에서 범죄나 간통등을 피할 수 있다면, 그러한 어두움의 길을 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강인한 성품에
감사해야 하겠죠?”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예”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의 열매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안 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대한 설교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의 감사 (정도를 벗어난)의 본질과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마땅히 간직해야 하는 은혜에 대한 적절하고 깊은 감사를 구별함으로써 적절한 기독교적 감사를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텍스트 포인트:
이 비유의 구조는 놀랍습니다. 바리새인을 묘사할 때 언어는 모두 높이를 암시합니다(교만에 대한 이미지가 항상 그렇듯이):바리새인은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함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사용하는 언어도 왠지 상향하는 느낌을 줍니다. 대조적으로 세리는 그와 관련해 모두 하향적 단어들로 표현됩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고,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않고 그의 가슴을 내려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9절에서 이 비유의 설정을 주목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추상적으로 누구나 모든 사람을 위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정의에 대해 확신하는 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궁금해집니다. 자신의 정의로 가득 찬 독선적인 사람들의 무리가 모였기에 이 비유를 말씀한 것인지, 아니면 예수께서 이러한 독선적인 경향을 너무나 잘 아셔서 이 비유는 언제 어디서든지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을 아신 것일까요? 후자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그리스도인의 가장 일반적인 경향 중 하나는 무엇입니까? 뿌리와 열매를 섞는 경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령의 열매를맺는 나무와 같다면 우리는 그 나무를 거꾸로 뒤집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감사하는 바로 그 종류의 영적 열매의 생산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
C.S. Lewis가 말했듯이 온실의 지붕은 태양이 비추기 때문에 밝게 빛납니다. 지붕이 처음부터 밝아서 태양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Lewis의 다른 비유에서, 여섯 살짜리 어린 소녀가 “아빠꺼 크리스마스 선물 사려고 하는데 5달러 주실래요?”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왠만한 대부분의 아버지라면 그 아이에게 돈을 줄 것이고,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면 아이가 산 물건에 대해 기뻐하며 큰 소리로 기뻐할 것 입니다.
아무도 아버지가 그 아이에게 미리 돈을 주었기 때문에 선물을 받는 계약이 이루어졌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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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9-14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