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13-35 주석

그의 아내가 죽은 후 C.S. Lewis는 자신과 아내 Joy가 자주 가던 곳을 의도적으로 피하면 슬픔이 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같이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만 다녀봤다고 합니다. 식료품점을 바꾸고, 식당도 바꾸고, 아내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거리와 오솔길만 걸었습니다. 그러나 슬픔이 덜해지지는 않았습니다. Lewis의 말을 빌리자면, “슬픔은 하늘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어딜 가든지 모든 것 위에 드리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근의 팬데믹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너무 큰 슬픔이 우리 위의 하늘처럼 느껴지는 데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두 여행자는 예루살렘을 떠나오면서 지난 금요일의 나쁜 기억을 뒤로하고 슬픔으로 부터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은 아이들이 다 떠나간 빈 집과 같이 되었습니다. 뼈아픈 추억과 이루어지지 않은소망으로 휩싸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들의 꿈이 깨어진 곳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러한 고뇌와 문제를 뒤로하고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Frederick Buechner가 이 본문에 대한 그의 유명한 설교에서 질문했듯이, 당신의 “엠마오”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하나씩 있는 엠마오. 어쩌면 삶에 대한 고민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시끌벅적 사람들로 붐비는 쇼핑몰일 수 있겠습니다. 아니면 창문 밖에서 소용돌이 치는 쓰라린 진실에 대해 무디게 만들어주는 술과 안주가 넘치는 어둡고 연기가 자욱한 술집 안일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할리우드가 자랑스럽게 “현실 도피 할인 요금”이라고 선전하는 영화를 보러 가는 극장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매일 저녁 무심코 채널 서핑을 할 때 당신을 모든 것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TV 리모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합니다. 그 때 엠마오로 향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슬픔과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고 2천년 전에도 그렇게 안되었습니다. 슬픔은 우리 위에 드리워져 있는 하늘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두 제자는 아마도 엠마오가 가야할 곳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의 대화는 그들이 사랑했던분, 그들이 희망했었던 메시야의 죽음에 대해 계속해서 맴돌았습니다. 진정으로 희망했었던 그 분에 대한 얘기를 계속 했습니다. (왠지 비참하게

느껴지는 과거분사) 사실 그들의 문제를 잊는 것은 실패하고 도리어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낯선 사람이 나타나 “샬롬! 무슨 일이야, 친구들?” 하고 말을 걸어 왔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냐는 질문에 모두가 아는 최근 소식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모르는 것 같은 이 사람에 대해서 의아해 합니다. “어디 있다 왔어, 이 친구. 이일에 대해 듣지 못한 사람은 이 나라 전체에서 당신 뿐 일걸”

그들이 그렇게 반응한 것은 아마도 그들의 슬픔이 극심하다는 증상일 것입니다. 사실 그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에게는 이것이 헤드라인 뉴스였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나가는 말로만 언급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저 또 다른 로마의 십자가 처형. 늘 있는 일일 뿐이죠. 예루살렘 신문3면에 묻혀 있는 부수적인 기사에 불과했습니다.

두 제자에게 가던 길에 나타난 이 낯선 사람은 그 소식에 대해 전혀 모르는 방문객 정도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들이 희망을 걸었었던 그 분이 결국 잘 풀리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희망을 걸었던 것이 큰 실수였던 것 처럼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 실수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수가 음식을 태우거나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잠시 혼돈한 것과 같이 그리 심각하지않은 경우, 비교적 쉽게 털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저지른 실수가 좀더 심각한 경우. 예를 들어 당신의 자녀를 성추행한 이웃을 신뢰했다거나 수십 년 동안 비밀리 연쇄 간통을 범한 남편을 신뢰한 것이라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당신은 단지 당혹스럽거나 약간의 속상함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그 실수에 의해 마음이 무너지는 걸 느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깜쪽 같이 속을 수 있었지? 아니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실수를?”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멍하니 보였던 그 낯선 사람이 갑자기 변합니다. 그는 먼저 이 두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대담함을 보이고 그들이 이에 반박하기도 전에 상당히 진지하고 깊이 있는 성경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 이후, 엠마오로 가는 나머지 여정은 금방 지나가는 것 처럼 느껴집니다! 이 익명의 동행자는 놀랍도록 간결하고 정확한 해석으로 성경의 이야기를 다시 전합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맞지만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힘차고 활력 있는 방식으로 성경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바로 돌아가신 그 분으로부터 였는데 하고 느꼈을 수 도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어느새 목적지에 서 있었습니다. 그 낯선 사람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 고개를 끄덕이며 “좋은 대화를 나누었네”라고 말한 다음 계속 걸어가려 합니다. 그래서 두 제자 중 클레오파스가 “선생님! 해가 지고 있는데요. 이 길에 밤 강도들이 곧 나올 것입니다. 어두울 때 혼자 여행 하시면 위험합니다. 적어도 오늘 밤은 우리와 함께 머무시죠.” 그 남자는 동의합니다. 여행으로 먼지 덮힌 얼굴과 손과 발을 씻은 후 세 사람은 저녁을 먹기위해 앉습니다.

두 제자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그 낯선 사람은 납작한 떡을 매우 친숙한 방식으로 들어 올립니다. 그런다음 감사 기도를 하고 그 떡을 손으로 떼어 클레오파스와 그의 친구에게 건네줍니다. 그 순간 그들은 그분이 누구 신지 즉각알았지만 “예수님!” 하고 부르기도 전에 그분은 사라지십니다.

“그러면 그렇지!” 클레오파스가 친구에게 소리칩니다. “너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방식, 성경을 적용한 방식, 여기 오는 내내 소름끼치게 익숙하지 않았어?” 그런 다음 곧바로 빵을 주머니에 채우고 기록적인 시간으로 7마일을달려 예루살렘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도착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소식을 알리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주께서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두 제자도 예수님과 만난 소식을 전합니다.

슬픔은 우리 위에 있는 하늘과 같지만 그러나 지금은 희망도 그렇게 느껴집니다.

텍스트 포인트

눅 9:16과 눅 24:30을 비교해 보면, 예수님이 떡을 들고, 떡에 대해 찬미하고 (또는 감사를 드리며), 떡을 떼고, 떡을 제자들에게 주는 과정에 사용된 동사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들고 (Takes)

찬미하고 (Thanks)

떼고 (Breaks)

주고 (Gives)

오천 명을 먹이신 말씀과 엠마오 방에서의 말씀 또한 거의 동일해서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행동이 분명히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만찬을 위한 신호기이기도

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실, 사도행전 27장 35절까지 확대하면 누가는 바울이 폭풍으로 배가 난파되기 직전에 배 동료들에게 음식을 먹일 때 들고, 찬미하고, 떼고, 주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합니다. 여기서도,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성사적인(sacramental) 임재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고대 그리스 신화 오디세이에서 우리는 오디세우스의 서사기를 읽습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운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신들이 일련의 시련을 통해 오디세우스의 진정한 기질을 시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전쟁후 그의 귀향은 오랜 세월 지체되었습니다. 그 사이 오디세우스의 여정은 그를 멀고 광활한 곳으로 데려다 주었고, 갖가지 신비한 짐승들과 모험의 땅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의 집에서는 오디세우스의 아내와 가족들이 그가 트로이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음이 틀림없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다 결국 신들이 오디세우스를 풀어주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왔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정문을 통해 “여보, 나 집에 왔어!” 라는 헬라어 표현으로 외치는 대신에 오디세우스는 그의 오랜 부재 기간 동안 변한 것 들이 있는지 확인하기로 결정합니다. 그의 아내가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지? 정조를 지켰는지? 이를 알아보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변장을 하고 임시 숙소가 필요한 방문객처럼 자신의 집에 접근합니다.

가정부 유리클리아는 오디세우스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방문객으로 그를 환영하고 당시 표준 관행 인 발 씻기를 수행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유리클리아는 오랫동안 잃어버린 주인 오디세우스가 어렸을 때 자신이 보모로 일했던 얘기들을 낯선 손님에게 들려줍니다. 그녀는 그에게 주인이 얼마나 오랫동안 실종되었는지에 대해 말했고, 이때 쯤이면 오디세우스가 그녀가 발을 씻고 있는 남자와 거의 같은 나이와 같은 체격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디세우스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한때 멧돼지에게 물려 다리에 끔찍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유리클리아의 손이 갑자기 그 오래된 흉터를 스치게 되고 즉시 그녀의 눈이 떠졌고 큰 기쁨으로 그녀의 사랑하는 친구이자 주인을 알아보게됩니다!

이와 같은 재회/인식 장면은 오랫동안 인간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겨 왔습니다. 잃었던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또 알아볼 때의그 감정의 충격은 오디세이뿐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연극, 소설, 그리고 영화를 통한 감동적인 드라마의 소재이기도 합니다. 물론 누가복음 24장에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