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전서 2:1-8 주석

우리는 이상적인 목회자, 선교사 또는 교회 리더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비전들은 상당히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상적인 목회자로 훌륭한 설교자를 꼽습니다. 다른 이들은 다양한 사람들을 사역할 줄을 아는 목회자를 원합니다. 많은 이들은 다양한 실력을 갖춘 좋은 리더를 원합니다.

이번 주일 말씀은 놀랍지만 상대적으로 드문 바울의 목회적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것 자체로는 그것을 설교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는 우리가 본받고 싶지 않은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데살로니가전서2장을 주의깊게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상이 있습니다.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 대한 목회적 염려와 돌봄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목회자의 염려와 돌봄의 이상적인 모델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 설교는 전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에게 축복인 동시에 도전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목회적 마음이 뜨겁다 해도 강한 반대는 교회에 대한 바울의 선교를 끝맺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선교사들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은 결국 그들을 데살로니가로부터 도망치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사라짐을 악의적인 비방용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명백히 겁쟁이라는 비난입니다.

바울의 적들은 바울이 그저 돈과 명성, 권력을 위해 선교 사업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이 위험에 처했을 때 왜 그렇게 도망치기에 급급했느냐란 의심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2장은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 대한 이 비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의 교회 방문을 “실패”라고 규정하는 것같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바울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에서의 그의 행동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방어는 복음을 나누었던 사람들에 대한 그의 심정을 드러냅니다. 그의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실제적인 면에서 바울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목회자와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는 것 이상의 무엇을 담고 있을까요?

사도는 “우리의 방문은 실패가 아닙니다”라고 1절에서 교회를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그의 방문 목적이 헛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목적을 갖고서 방문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1절에서 밝혔듯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 목적에 대해 확실히 알았습니다. 바울의 데살로니가 사역은 짧고 어려웠지만 눈에 띄었습니다. 사도행전17:2에서 우리가 읽듯이, “그의 관례에 따라 바울은 세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숨길 것이 없었기에 바울 사도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거리낌없이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조금도 숨김이 없이 공개적으로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성경을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불법 행위에 대한 혐의들은 일부 목회자와 리더들이 마치 은폐할 것이 있는 것처럼 은밀하게 행동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의 사역에 관심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투명해야 하지만 항상 그런 것같지는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은 전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에게 투명한 삶과 사역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2절에서 언급하듯이 그의 사역의 공개적인 행보가 그에게 상처와 모욕을 안겨다 주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데살로니가에 도착하기 전부터 말입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에서 권력자들은 실라와 바울을 채찍질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고통과 모욕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권력자들이 공개적으로 그들을 매질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로마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재판도 없이 말입니다.

사도행전 17:4이 기록하듯이,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의 설교를 통해 성령은 유대인들과 귀부인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헬라인들을 회심시키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의 시기심을 촉발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7:5에서 읽듯이, “그들이 시장에 있는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적개심은 바울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도록 용기를 주셨습니다. 실라와 함께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빠져나와 베뢰아로 가서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불량배들이 베뢰아에까지 와서 바울을 대적하도록 군중을 충돌질했을 때에도 바울은 아덴에서의 사역을 위해 그 곳을 빠져나왔습니다.

이런 장면들을 읽을 때에 믿음을 나누는 일에 내가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나의 빈약한 증언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던질지 모르는 곤란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를 놓고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나의 두려움은 선교 사역에서 바울이 보였던 담대함과 대조적입니다. 이것은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이로운 대담함과도 전혀 다릅니다.

솔직히 복음을 나누는 일에 있어서 나의 소심함은 적대적인 환경에서 사역하는 많은 선교사들이 보이는 담대한 용기와 정반대입니다. 나는 바울이 했던 것처럼 어떤 반대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나눌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폭력적인 반대를 불러일으킨 데살로니가에서의 사역을 기억하면서 네 가지 비유로 자기 자신을 묘사합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셨던 기술과 목회적 마음에 대해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그에게 복음을 위탁하셨음을 바울은 이해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집주인이 관리인에게 그의 재산을 위탁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음과 함께 그것에 신실하도록 책임감을 주심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복음을 받기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나눌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복음이 우리를 빚어갑니다.

3절에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에 대해, 그리고 복음을 맡은 청지기로서 어떤 속임수도 없음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가 말한 것이 진심이었음을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에게 위탁하신 복음을 그가 어떻게 그리고 왜 말했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4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은 사람처럼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 모두가 최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사역에서의 그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 설교 주해 작성에서 빚을 지고 있는 존 스토트는 이것이 기독교 사역의 핵심이라고 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으로 교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책임이 있습니다.

물론 이 책임감은 우리를 성가시게 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은밀한 마음을 시험하시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기준들이 매우 높다는 것도 압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다룰 때에 최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자각은 또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이나 조직보다 훨씬 더 지혜로우시며, 공평하시며, 자비로우심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최우선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본문 5-8절에서 그 자신을 비유한 ‘엄마’와 같이 어떤 면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의 엄마 돌봄이 어떻게 데살로니가에서 증명됩니까?

본문 7절에서 사도는 그의 ‘유순함’을 말합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매섭게 하지 않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사역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엄마 돌봄에 있어서 바울은 절대 ‘아첨’ 또는 ‘속임’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결코 자신들의 명성을 쌓기 위해 교회 또는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대한 구원의 소식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기록하듯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영적 부모로서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짐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에게 명령을 하거나 돈을 지불하라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영적 “부모들’이 때때로 그렇게 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본문 8절에서 사도가 썼듯이, “우리는 엄마가 어린 자녀들을 기름과 같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그들의 방식을 강요하기 보다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친절하게 돌보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을 위해 사역하라고 요구하는 대신에 그가 그들을 위해 사역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나눌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과 영혼까지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기에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그의 삶 전체를 다 공개할만큼 온순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모습이 다른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기심과 권위주의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권위에 도전할수록 우리는 그것을 더욱 고집하려 합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온유함, 사랑, 자기 희생을 더욱 더 키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와 선교사들, 교회 리더들, 또한 우리 자신들을 평가하기 위한 많은 기준들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나은 것은 많지 않습니다. 즉, 우리는 온유하게 가르치고 설교하고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복음의 청지기들입니까?

예화 아이디어:

게리 윌즈는 그의 책, “Reagan’s America: Innocents at Home”에서 주목할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의 분명한 “실패”(살전2:1참조)에 대한 것입니다. 카터는 마지막 임기에 있어서 대통령으로서 이미 정치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인플레이션, 아프카니스탄, 이란 등의 이슈들이 그를 넘어뜨렸습니다.

윌즈는 연방준비 은행의 폴 볼커가 다음과 같이 카터 대통령에 대해 요약했다고 썼습니다. “제리 포드가 백악관을 떠났을 때에 그는 지미 카터에게 세 개의 봉투를 남겼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문제들을 만날 때마다 하나씩 열어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일년이 지난 후에 카터는 첫 번째 봉투를 열었습니다. ‘제리 포드를 공격하십시오”라고 써 있었고 카터는 그대로 했습니다. 다시 일년 후에 카터는 두 번째 봉투를 열었습니다. ‘연방준비 은행을 공격하십시오’라고 써 있었고, 카터는 그대로 했습니다.

그의 임기 삼년 차에 경제, 이란, 아프카니스탄 이슈가 더 악화되었을 때에 카터는 세 번째 봉투를 열었습니다. ‘세 개의 봉투를 준비하십시오’라고 써 있었습니다”(이 말은 다음 대통령에게 세 개의 봉투를 남겨라는 뜻으로, 카터는 이미 대통령으로서 실패했음을 인정하라는 의미입니다-역자주). 물론 카터는 대통령을 그만둔 이후에 사랑받고 인정받는 인도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매우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