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지키라”(14)고 사랑하는 아들인 디모데에게 말한 바울의 당부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제가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존 스토트의 주석인 디모데에게 쓴 사도의 두 번째 편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복음을 지키라”는 바울의 당부는 이번 주일 서신 공과의 선포에 있어 진입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바울은 직접적으로 디모데후서 1장에서 디모데에게 “복음”을 지키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대신에 디모데에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도우심으로…네게 부탁한 선한 것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 “선한 것”이란 사도가 “믿음 안에서 참 아들”(1:1)이라 부른 이 젊은이가 지켜야 할 것으로 적어도 복음을 포함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지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phylaxon입니다. 이 동사는 어떤 것을 보존하거나 보호하기 위해 주의깊게 지켜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지킨다는 것은 그것이 손상되거나 해를 입지 않도록 주의깊게 돌보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스토트는 그의 책인 Guard the Gospel(IVP, 1973)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아름다운 것” 즉, 복음이 어떤 사람이나 일로 인해 잃거나 손상되지 않도록 지킬 것을 권한다고 설명합니다.
복음을 지키라는 사도의 요청은 12절에서 그가 사용한 동사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 동사는 정해진 시간의 끝에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이 하실 것에 대한 바울의 확신을 표현합니다. 바울은 거기서, 하나님께서 바울이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지키실 것에 대해 바울은 디모데에게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는 구원의 복음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디모데후서 1장을 설교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복음을 지킨다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본받는 것임을 청중들과 함께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것은 매우 고귀한 소명과 막중한 책임감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확신도 함께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복음을 지키라는 사명을 주셨지만, 아무도 그 복음을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름다운 보물’(텐 칼렌 파라세켄)을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가치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선한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맡기는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스토트는 이 보물을 복음으로 보며, 그것은 선하고 고귀하고 귀중한 보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바울에게, 또한 디모데와 교회에 맡기신 복음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앞 단락에서 바울은 이 아름다운 보물인 복음이 오랫동안 디모데의 삶의 일부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디모데의 할머니인 로이스와 엄마인 유니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디모데와 이 아름다운 보물을 나누었는데, 바울은 이제 이 복음이 디모데 안에도 살아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9-12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아름다운 보물은 영원한 과거와 미래를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영원 전부터”(9절)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는 10절에서 이 은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다”고 선포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 아름다운 보물의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11절)로 세우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 이 아름다운 보물의 완전한 영광은 “그 날에”(12절) 곧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다시 오심으로 이해하는 정한 때의 마지막 날에 온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이번 주일 서신 공과를 설교하는 이들은 이 귀한 보물을 지킨다는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탐구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은행 직원들이 고객들이 맡긴 돈이나 귀중품을 지키는 모습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또는 자신의 소중한 알이나 새끼들을 포식자로부터 보호하는 어미새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엘리베스 여왕의 유해를 지키기 위해 엄숙하게 서 있는 경관들의 모습을 우리의 청중들이 떠올릴 수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복음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 그리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를 보면 그 위협들에 관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겔로, 허모게네, 그리고 아시아 지역에 사는 이들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 복음에 대한 위협들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버렸는지”에 대해 탄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권력자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를 외면했던것으로 보입니다. 스토트는 어떤 학자의 말을 이렇게 인용합니다. “믿음의 눈을 제외한 모든 눈에는 바로 그 때가 복음이 사라지기 직전인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14절에서 바울이 언급하듯이, 디모데나 어떤 그리스도인도 이러한 위협들로부터 귀한 보물인 복음을 혼자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는 자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을 손상시키거나 파괴하려는 모든 적들로부터 그것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주일 서신 공과 설교를 준비하면서 두 가지를 더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복음의 보증인이시고 궁극적인 수호자이십니다. 복음이 안전한 것은 인간 보호자의 경계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적들은 복음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복음이 훼손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스토트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귀한 보물인 복음을 인간 손에 맡기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자신의 손에서 완전히 놓지 않으십니다.
둘째, 설교자들은 복음이 실제로 무엇을 포함하는지를 탐구하는 일에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회중들이 복음을 잘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복음의 모든 핵심 내용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설교자로서 기독교 윤리와 복음의 핵심 요소들을 구별해 주는 것은 도움이 될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수호하려는 노력에는 일종의 격렬함이 있습니다. 인간의 성, 남녀의 역할, 그 외의 주제들에 대한 우리의 논쟁은 때때로 치열합니다.
그러한 주제들에 대해 겸손하고 예의바른 토론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신경과 같이 복음의 핵심 내용을 아름답게 요약한 것을 우리의 윤리와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따름이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진정 지키고자 하시는 복음의 핵심 요소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의 구속 사역 곧 그분의 삶, 죽음, 부활의 충분성에 대한 의문 제기야말로 복음에 대한 심각한 공격이며, 예수 따름이들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바쁘게 움직여야 할 이유가 됩니다. 훌륭한 수호자는 복음에 대한 위협들과 복음의 윤리적인 적용에 대한 의견 차이를 분별할 줄 압니다.
예화
프레드릭 뷰크너는 그의 감동적인 책인, “진리를 말하기: 비극, 희극, 그리고 동화로서의 복음”(Telling the Truth: the Gospel as Tragedy, Comedy, and Fairy Tal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 되기 전에 나쁜 소식입니다. 그것은, 옛 용어를 쓰자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란 소식입니다. 그 마음의 상상 속에는 악이 있으며, 거품투성이로 거울을 들여다볼 때 그가 보는 것은 적어도 여덟 부분은 겁쟁이, 위선자, 게으름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비극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희극이 있습니다 –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동화가 있습니다 –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달팽이가 껍질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누구도 자기 등에 짊어진 세상의 어둠을 벗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바로 동화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진리가 됩니다.”
디모데후서 1:1-14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