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0:5-15 주석

성경의 본문 중 저에게 이번 주 서신서 본문만큼 깊고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본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히 14-15절은 이 구절에 관해 도움이 될만한 주석을 쓰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에 저 자신을 맡기고자 할 때, 저를 한편으로는 불편하게 만들고 또 깊이 고민하게 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13절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의역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부르는 사람은 도움받는다.” 이어지는 바울의 질문 또한 그는 이렇게 풀어냅니다.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분을 알지 못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구할 수 있겠는가? 신뢰할 수 있는 분에 관해 들어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분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누군가 말해 주지 않는데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저는 내년에 은퇴를 앞두고 있습니다. 제 사역과 인생의 상당 부분을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그 분”을 전하는 데 바쳐 왔습니다. 그러나 1년 뒤면 저는 더 이상 공식적으로 그 일을 맡은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25년 넘게 아내와 저는 정통 유대인(Orthodox Jewish)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사는 큰 특권을 누려왔습니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 안에 수백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 집과 교회 반경 400미터 안에는 정통 유대교 회당이 네 곳이나 있습니다.

특히 지난 5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아내와 저에게 이웃인 정통 유대인들과 셀 수 없이 많은 대화를 나눌 은혜를 주셨고, 그들 중 일부와는 친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단지 날씨나 가족 이야기만 나누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서로의 신앙에 대해서도 깊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말뿐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도 우리의 믿음을 나누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 왔습니다.

하지만 내년에 이사를 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더 이상 그곳에 없다면, 우리 유대인 이웃들은 어떻게 예수님에 관해 들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전했던 복음은 어떻게 될까요?

물론 이번 본문만 놓고 보면 바울이 구체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문제를 말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로마서10:5-15은 이스라엘 백성을 직접 언급하지도 않으며, 이스라엘을 언급할 때도 그들이 믿음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데 실패했다고 직접 연결하여 다루지는 않습니다.

설교자들은 이런 이유로 이 본문을 단지 “복음을 전하라”는 일반적인 권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콧 호제이(Scott Hoezee)는 그런 접근 방식을 경계합니다. 그는 설교자들에게 로마서 10:5-15을 원래의 문맥에서 떼어내어 단지 복음 전파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축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정통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사역하지 않으며,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정통 유대인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본문의 의의가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 말과 행위로 의를 이루려 하는 것은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본능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씁니다.

물론 로마서 9장부터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을 깊이 슬퍼해 왔습니다. 그는 2절에서 그들의 종교적 “열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기보다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썼기 때문입니다(3절).

그렇다면 바울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이, 심지어 자신의 유대인 동족들까지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13절)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그 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어서 묻습니다. “[유대 동족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14절)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분에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까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동네 교회 목사에게 갑자기 집의 배관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전화하는 꼴일 것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은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한다고 암시합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에 “관해서는” 들어봤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 가족의 경험으로 보아, 오늘날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관해서도 기초적인 지식 외에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대인이든 아니든, 우리 이웃들 대부분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묻습니다. 그의 유대 동족들이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14절) 여기서 그는 “듣는 것”이 곧 “믿음”으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도 자신이 거의 알지 못하는 대상에게 도움을 청하지는 않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분에 관해 들어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분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이어서 “듣는 것”을 “전파”와 연결 짓습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4절)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과연 “전파”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설교나 복음 선포만을 의미할까요, 아니면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삶의 모든 행위를 가리킬까요? 특히 유대인 이웃과의 관계라는 맥락에서는 이 질문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전파는 반드시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말과 행동 모두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증언하는 일일까요?

우리의 전도 대상 중에는 설교자나 설교 그 자체에 상처받은 이들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겪어 온 깊은 아픔에는 역사적·문화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합니다. 또한 그들 중 일부는 그리스도인들의 일방적인 전도 방식 때문에 상처받기도 했습니다. 지혜로운 설교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함을 행동으로 먼저 보여준 이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5절 상반절에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이것은 아직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파자들”을 보내라는 교회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여기에는 안수받은 목사나 선교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포함됩니다.

어쩌면 이 사실은 모든 단계에 있는 사역자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가장 복된 소식을 전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공식적인 사역이 끝난 뒤에도 그 복음을 계속 전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우리와 함께, 또 우리 뒤를 이어 복음을 전할 새로운 사역자들을 보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화

이전 주석에서 스콧 호제이는 마릴린 로빈슨의 명작 소설 《길리아드》(Gilead)의 한 대목을 조명합니다. 주인공인 존 에임스 목사는 어린 아들에게 남기는 글 속에서 되풀이되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죽은 뒤 다락방에 쌓여 있는 내 설교 원고들은 어떻게 될까? 애초에 그것들을 보관할 가치가 있기는 했을까? 훗날 누군가가 그 오래된 설교들을 읽고 싶어나 할까? 이미 선포되어 사라진 설교는 마침내 무엇이 된단 말인가?”

결국 에임스는 이렇게 마음을 정합니다. “네 엄마에게 내 오래된 설교 원고들을 태워달라고 해야겠다. 집사님들이 도와주면 될 게다. 불을 지피기에 양은 아주 넉넉할 테지. 핫도그와 마시멜로를 구워 먹으며 첫눈을 축하하기에 딱 좋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내가 간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남겨 두어도 된다만, 거기에 너무 애는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설교들이 의미가 있었든 없었든, 그것으로 다 된 것이다.”

에임스의 말은 모든 설교자와 증인의 마음을 울립니다. 우리가 뿌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자랄지는 결국 우리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할 뿐입니다. 그 이후의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