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순종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그것을 부모의 관점에서 보느냐 자녀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결국 훌륭한 미국 설교자 Fleming Rutledge가 지적한 것처럼 부모는 순종하는 자녀를 원합니다.
우리는 뜨거운 난로를 만지거나 술을 남용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지 않는 아들을 원합니다. 당신과 나는 길을 건너기 전에 양쪽을 살피고 숙제를 하는 딸을 원합니다. 그러나 불순종은 매우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십대들이 노는 숲 속에 빈 맥주병들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누구도 아이들에게 순종하지 말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부모가 그들의 자녀에게 순종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들이 주님께 순종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육신의 부모는 때때로 자녀들에게 그릇된 순종을 요구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라고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양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십계명이 있습니다. 이 사이트의 많은 독자들이 속해 있는 일부 교회와 교단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그들에게 더 많은 공적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그러한 명령에 더 순종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의 선포자들은 우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청중과 우리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외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모든 선한 일에 대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 우리는 어땠습니까? Rutledge는 “유아 전능의 신화”라고 불리는 인간 발달 단계를 소개합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영유아가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며 통치한다고 생각 한다는 의미입니다.
네 살짜리 아이가 번잡한 거리에서 양쪽을 먼저 보지 않고 뛰어드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아 이의 아빠가 화를 내며 “넌 나쁜 애야”라고 대답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비난은 아이가 자신이 지구상에서 가장 나쁜 아이 중 하나라고 믿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여자 아이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그 여자 아이의 악함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Rutledge는 그러한 가정에서 두 가지 모순된 결과가 나온다고 지적합니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너무 나쁘다는 것을 속으로 싫어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존감 상실”이라고 부릅니다. 둘째,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재빨리 전가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당연히 우리 자신에게 궁극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하거나 우리의 순수함에 대한 환상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을 작은 신으로 만듭니다.
결국, 우리가 주고 받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거의 항상 같은 후렴구의 변수입니다. “넌 좋은 여자 아이야. 당신은 훌륭한 청년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성공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장난꾸러기이고 누가 착한지 목록을 만들고 두 번 확인하십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사과를 깨물은 것은 불순종의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그는 Rutledge가 제안한 것처럼 전 세계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먼저 자신을 가리려고 시도함으로써 “나쁘다”고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숨기지 못하자 아내를 탓했습니다. 차례로 하와는 뱀을 탓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순종한 첫 조상 모두에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나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영원히 불순종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동산 밖으로 쫓아내셨고 그들의 수명에 제한을 두셨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첫 조상을 버릴 수 있었고 또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순종을 심판하셨지만 가혹함과 정죄를 받아 마땅한 그들에게 자비와 긍휼과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조상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우리 본문의 끝에서 이 이상한 말을 씁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려고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도록 가두셨느니라.” 그는 마치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의 일부로 우리의 악함을 만드셨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엄마가 딸에게 “넌 나빠” 또는 “넌 나쁜 짓을 했어”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제 십대 딸이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 저는 나쁘지만 하나님은 자비롭게도 저를 좋게 만드실 거에요.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한때 아이들에게 비슷한 것을 가르쳤습니다. Rutledge는 그들에게 “당신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묻는 오래된 교리문답을 언급합니다. 아이들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저는 순종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를 이 구원의 상태로 부르신 하늘 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제 인생이 끝날 때까지 같은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이 은혜를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본래 “나쁜” 사람들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어떤 형태로든 불순종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우리가 그 불순종에 영원히 얽매이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악조차도 하나님보다 더 강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강하시므로 어떻게든 우리의 불순종이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인해 우리의 불순종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실 것입니다.
이번 주일 RCL 서신교과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공동체인 “경건한 백성”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은 “경건하지 않은”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쓴 것처럼 로마 교회에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한때 버림받았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믿음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Rutledge는 이러한 변화가 정상적이라고 지적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우리의 타고난 죄성을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축하하려는 유혹은 항상 있습니다.
로마 교회의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하나님의 약간의 도움으로 그들 스스로 주님께로 돌이켰다고 믿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20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믿음으로 서고 교만하지 말고 두려워하라.” 그래서 그는 기본적으로 독자들에게 “당신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당신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30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던 너희 이방인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긍휼을 입은 것 같이 이제 유대인들이 불순종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결과 이제 그들도 긍휼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일종의 연쇄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데 Rutledge는 우리가 얼어붙은 고속도로에서 여러 대의 차량이 부딪쳐 쌓이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불순종하는 모든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인 충돌을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자비를 보이시기로 선택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체 연쇄 반응을 유발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긍휼을 베푸셨기에 이스라엘에게도 긍휼을 베푸시겠다고 맹세하십니다.
결국, 바울이 32절에서 요약한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려고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도록 가두셨느니라.”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려고 모든 사람이 악하게 된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신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들의 불순종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로 만드셨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보여주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위해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셨고 다른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반항적인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나 2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온전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부분적으로 강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기록된 바와 같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니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함을 돌이키시리라’” 바울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서 “경건치 아니함을 돌이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에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추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악을 선으로, 불순종을 순종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자녀라 할지라도 불순종을 순종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사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악을 선으로 바꾸셔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신실하게 받은 자들에게 우리가 오직 은혜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일시적인 불신앙에 빠지게 하셨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신자들을 볼 때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기로 가노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불신앙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믿을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결국, 계명 중 하나라도 꾸준히 지키는 “착한 소년 소녀”는 누구입니까?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차이가 없나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로마서 11장 32절의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려고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게 하셨으니”의 “모든 사람”은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한 끈끈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바울은 의미는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는 뜻입니까? 그의 말의 의미는 26절에서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뜻입니까?
판타(panta)라는 헬라어 단어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26절과 32절 끝 부분에서 더 제한적이라고 믿는 “모든”에 대해 32절의 시작 부분에서와 같이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믿는 “모든”에 대해 동일합니다. 즉, 본문에서 “모두”로 번역하는 각 단어는 헬라어에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에게만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고 공언해 왔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성경의 헬라어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완전히 확신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사람들을 은혜롭게 구원하실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원하는 믿음은 물론 우리의 결정 이전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결국 모든 기독교인도 선천적으로 악합니다. 우리 모두는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거절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믿음과 우리가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성령의 은사로 우리 중 일부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그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감사하게도 우리 손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남아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Scott Hoezee의 2017년 8월 로마서 11장 주석에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로마서 11장과 하나님에 대한 친절하면서도 엄한 말씀은 J.R.R.의 톨킨의 ‘호빗’과 ‘반지의 제왕’ 3부작의 마법사 간달프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간달프는 종종 그를 존경하는 호빗들에게 약간의 미스테리였습니다. 그는 때때로 매우 친절하고 명랑할 수 있지만 때로는 다소 가혹하고 무뚝뚝해 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호빗들은 간달프에 대한 더 깊은 진실을 배웠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친절하고 선했고 때때로 그에 대한 엄격함이 있었지만 오래 가지 않았고 이것 조차도 모든 사람을 번성하기를 원하는 간달프의 간절한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즐거움과 선함을 가로막는 것에 대해서는 엄격했지만, 그의 모든 행동을 이끌어낸 것은 그의 기본적인 친절과 사랑이었습니다.”
로마서 11:1-2a, 29-32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