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문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연합보다 부족하게 여겨지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오랫동안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사실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21세기 교회와 교단들은 마치 우리가 옷을 갈아 입는 것처럼 끊임없이 분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기도하셨던 연합보다 신학적 정통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에서 바울은 고대 시대의 어두운 배경 가운데 있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연합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초대 교회의 분열의 맥락 속에서 연합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강한” 그리스도인과 “약한” 그리스도인의 사이의 분열을 다룹니다. 그는 로마서 14:1 말씀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는 권면으로 그 분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적절한 반응을 요약합니다.
Orrey McFarland 라는 신약학자는 이러한 수용의 근원에 대해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리스도 사건,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하나님 은혜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세상의 부나 지위와 상관 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기독교 공동체를 괴롭히는 분열을 압도한다고 지적합니다.
물론 은혜가 기독교 공동체의 연합의 기초이지만, 그렇다고 사회적, 인종적 차이를 제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는, 그 대신, 그러한 차이점들을 지닌 이들을 포용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는 우리 각자의 독특함이 서로를 분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지 않게 하면서 오히려 이를 축하하게 하는 방법을 찾게 합니다.
바울은 또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 전반에 걸쳐 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 사이에서 흔히 발생하는 분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은 유대인들이 특별한 방법으로 비유대인들과 분리된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비유대인들에게 축복이 되어 하늘과 땅의 하나님을 향하게 되기를 바라셨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비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간의 관계의 본질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은 유대인들만 아니라 비유대인들에게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축하하기 위해 구약성경으로 돌아갑니다.
물론, 비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간의 분열은 지금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시대처럼 기독교인의 대화 전반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5장을 설교하는 이들은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분열시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대의 분열 중에는 신학적이고, 예전적이고, 교회적인 것과 관련된 것들이 있습니다. 정치적이고, 환경적이고, 사회경제적인 의견 차이 역시 그와 동등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논쟁거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로마서 14:1에서 바울이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다투곤 합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의하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핵심 사항들에 대해 논쟁합니다. 그러한 논쟁들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서로 동의하지 않겠다고 할 수 있는 사항들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그러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너무나 격렬하게 다투다가 의견이 다른 이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배경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을 간청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연합이 매우 애매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양자 된 자녀들 사이에 이루어 지는 모든 연합이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도우심에 크게 의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인내와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와 서로가 같은 뜻을 품고 한 마음이 되어 그리스도 예수를 따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썼습니다(로마서 15:5).
내가 이전 주석에서 이 구절에 대해 쓴 것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말한 “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연합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킬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그러나 본성적으로 분열적인 사람들에게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지 않고, 바울이 “더 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도록 능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실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사도 바울이 이번 주일 서신서 말씀을 소망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들을 당신과 평화로 가득 채워 주셔서 우리가 “차고 넘치는 소망”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될 수 있습니다(로마서 15:13).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너무나 깊게 분열되어 있어서 우리가 언젠가 하나 될 것이라는 희망을 쉽게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친구들이 심하게 분열된 신자들의 몸 외에 결코 하나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메시지 성경이 로마서 15:13 말씀을 의역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이 “희망으로 넘쳐 흐르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합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분열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바울의 인식은 또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 여러분을 받아 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를 받아들이십시오”라고 촉구하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로마서 15:7). 그렇게 하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갈망하시고 연합하도록 준비시키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일종의 영감 어린 본보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받아들인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프로슬람바네스테’(proslambanesthe)입니다. 이 단어는 “환대한다” 또는 “수용한다”과 같은 다양한 말로 번역됩니다. 이 단어는 종종 예의상 나누는 인사나 환대의 일반적인 모습을 암시하곤 합니다. 그러나 Jennifer Vija Pietz라는 신약학자는 바울이 이 동사를 사용한 것에서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합니다. 그녀는 사도 바울이 ‘받아들임’이라는 말을 관계와 연결시킨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친구들이 환영하는 이들은 우리가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대상들입니다.
결국,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입양된 형제자매들에게 은혜롭게 확장하신 용납의 본질입니다. 그분이 자신에게서 멀어진 사람들만 환영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원수가 된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은혜로우신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하지만 Pietz는 이렇게 이어갑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환대’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환영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예배당에 앉아서 간단하게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나, 목사가 강단에서 방문객들에게 일반적인 환영 인사를 건네고 예배 후 대화할 시간조차 갖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신 것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대가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시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을 섬기신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 궁극적인 사랑의 선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힘을 주어, 비록 자신에게 어려운 또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경우에도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세우는 방식으로 서로를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이 서로에게 이런 환영을 베풀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 “우리 모두가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로마서 15:6) 이것은 적어도 바울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분열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일을 방해할까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입양하신 다양한 자녀들 사이의연합은 그 영광을 증폭시키고 강화시킵니다.
물론, 우리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여전히 상당한 신학적이고, 예전적이고, 교회적인 분열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분열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새 땅과 하늘의 특징이 될 완전한 연합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차이점에 집중하거나 심지어 집착하는 것은 희망의 하나님 안에서 서로의 기쁨과 평화와 신뢰를 누릴 수 있는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은 설교자들에게 예수님의 친구들로 하여금 적어도 그러한 차이점을 이해하려는 방법을 모색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함께 일하게 하는 방법을 찾도록 돕습니다. 예수님의 친구들이지만, 아직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공동의 선을 위해 함께 일하고 기도할 방법을 찾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Jonathan Haidt가 The Atlantic의 2022년 5월호에서 미국의 분열에 대해 쓰는 동안, 그는 수많은 나라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2010년대에 미국에 일어난 일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분열된 나라에 대해 내가 찾은 최고의 은유입니다. 아주 갑자기 뭔가 끔찍하게 잘못되었습니다. 우리는방향 감각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언어를 말하거나 같은 진실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그리고 과거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붉은 미국과 푸른 미국이 같은 영토를 주장하는 서로 다른 헌법관과 경제관과 역사관을 가진 나라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꽤 오래전부터 분명해져 왔습니다. 그러나 바벨탑 이야기는 부족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분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견고해 보였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사람들이 흩어졌습니다. 이는 빨간색과 파란색 사이에서만 아니라,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한 대학들과 회사들과 전문 단체들과 박물관들과, 심지어 가족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한 비유입니다.”
로마서 15:4-13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