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13-25 주석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거나 적어도 무기한 연기하기 위해 거의 모든 일을 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소유를 맞바꾸려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 훨씬 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게 될 것이라 믿고 있다고 느낍니다. 몇몇 장의사와 생명 보험 판매원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훨씬 더 행복하게 될 것이라 가정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처음에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들의 반응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하기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결코 범한 적이 없는 죄에 대해 누군가 처형된 것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끔찍한 비극과 지독한 불의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그가 이상주의적 순교자에 불과했던 것이라 추측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할 것에 대해 뭔가 말씀하셨지만, 첫 번째 성 금요일이 끝날 무렵, 그 말씀은 아마도 망상에 빠진 사람의 횡설수설 정도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 끔찍한 첫 번째 성 금요일 저녁에 죽음이 어떻게 보였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날의 모든 소란과 분노가 가라앉은 후, 죽음은 마치 자신의 폭력배인 죄와 사탄과 더불어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세계 챔피언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만약 죽음이 죽어 마땅치 않은 유일한 사람을 해칠 수 있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온 세상의 운명이 결국 그와 함께 죽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부활절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은 디펜딩 세계 챔피언인 죽음과 결판을 내셨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새로운 세계 챔피언으로 삼으셨습니다.

첫 번째 성 금요일의 어둠이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다는 것을 상징했다면, 첫 부활절의 어둠은 예수님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완벽한 상황을 제공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첫 번째 부활절에,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예수님의 죽음을 지휘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첫 번째 부활절 아침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승인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의 첫 조상이 유혹에 굴복한 이래 죽음과 죽음의 폭도들이 줄곧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죽음은 모든 세대를 닥치는 대로 제거했고, 아담부터 예수님에게 이르는 모든 사람을 내리쳤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 중 몇 사람은 죽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 속으로 곧장 들어감으로 죽음을 면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에녹이나 엘리야 같은 이들이 죽음을 정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것을 “회피”했을 뿐입니다. 죽음은 계속해서 죄인과 성도, 지배자와 피지배자, 고용주와 고용인, 심지어 어린 아이들을 요구했습니다. 실제로 죽음은 지난 한 해 동안 특별히 바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부활절 첫째 날 아침, 하나님께서는 죽음과 죽음의 폭도들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죽음이 그 영광스러운 아침에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부활절 아침에, 처음으로 죽음과 그 동료들은 누군가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마지 못해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급한 축하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이후로 죽음에 이른 사람의 수는 단 한 명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죽고 있으며, 지난 한 해에만 수백만 명이 코로나(COVID-19)로 죽었습니다. 서신서의 교훈을 선포하는 설교자들과 청중인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재림하시지 않는 한 우리도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다른 어떤 것보다도—죽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갖는 의미를 변화시킵니다.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부활절 승리는 우리가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과 더불어 노래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결과적으로 한 신학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이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우리를 두렵게 할 수는 있지만 해칠 수 없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사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죽음이 마치 침을 잃은 말벌과 같다고 주장합니다. 죽음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끄러운 소리를 잔뜩 냅니다. 그러나 죽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겁은 줄 수 있을지언정 더 이상 지속적인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물론, 때때로 죽음 자체는 여전히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인들이 죽으면 죽음은 더 이상 우리의 목을 조를 수 없습니다. 죽음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남은 자들을 여전히 괴롭히지만, 죽은 사람들에 대한 지배력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한 동료가 지적한 것처럼—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후 육체적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종종 “잔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전서 4:14에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제 동료는 이번 서신서의 선포자들이 바울이 예수님을 가리켜 “죽으셨다”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잠자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죽음을 묘사하기 위해 “잔다”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죽음의 충격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하나님의 지극히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 죽음을 실제 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전히 죽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죽음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잠자는 사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상쾌하게 깨어날 수 있도록 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를 거두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미래에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것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한 하나님의 입양된 아들과 딸들에게 지금 여기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승리자에게 전리품이 돌아간다”와 같은 말을 합니다. 우리는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시는 “전리품”이 우리의 “의”, 곧 우리의 칭의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기 때문에 하늘의 배심원단이 더 이상 우리의 평결을 저울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결문은 이미 제출되었고 다음과 같이 선고했습니다: 피고는 주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바르게 관계 맺도록 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첫 조상들이 죄를 범했을 때, 그들은 그 관계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들은 자신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 모두를 유죄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했습니다. 죄는 가장 성스러운 사람들조차도 자신을 완전히 구원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 밖에 있는 어딘가에서 그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좋은 관계를 가진 사람이 우리에게 그 관계를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태어나기 전 그는 하늘 아버지와 단지 완전한 교제를 누렸던 것만 아니라, 완전히 의로우셨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는 완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을 대적하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분이 입양된 혈육들과 그 의를 나누고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이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제 동료 스탠 마스트(Stan Mast)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어떤 일도 하지 않고 모든 공로를 인정받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만큼 그분의 의를 나누기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도 압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메마르고 덥고 건조한 미국 남서부를 여행하는, 절박하게 목이 마른 사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 마실 것을 살 돈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실 것이 바로 앞에 있음에도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는 위대한 결혼식 피로연, 즉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안에 있는 영생을 위한 모든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초청하신 배고프고 목마른 손님들은 그 잔치에 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큰 잔치에 초청하신 그들은 그 자리에 오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손님들을 데려와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양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에 굶주리고 목말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조건대로 그 잔치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오셨고 우리를 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목마름을 위한 생명수와 배고픔을 위한 생명의 떡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입과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손까지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순종적으로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믿음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탕자를 용서하시고 그의 귀환을 환영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주님은 탕자를 바울이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고 부르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빈 무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의 깊게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순종하는 믿음으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여기실 뿐 아니라 그렇게 대우하신다는 사실도 적극적으로 신뢰합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하나님은 로마서 4장의 선포자들과 청중들보다 우리의 죄를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께 그리고 서로에게 언제 죄를 짓는지 너무나 완벽하게 알고 계십니다. 결과적으로 부활절은 하나님의 시야를 흐리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극히 사랑하시는 백성들이 마치 하나님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고 심지어 생각할 때조차도 여전히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마치 한 번도 죄 짓지 않은 사람처럼 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친구들을 대하실 때 마치 그들이 다른 사람이나 어떤 사물도 전혀 신뢰해 보지 않은 사람처럼 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주의하게 사용한 적도 없고 사회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을 소홀히 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준비시키셔서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서로를 우리 자신만큼 사랑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를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로 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지금도 때로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불완전하게 지도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은 우리에게 한 약속을 어기고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하신 것처럼 그들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우리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로 대할 수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안네 프랑크의 일기』라는 유명한 책에서 그 젊은 여성은 자신의 일기에 대해 이렇게 씁니다. “나는 내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 살아 있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 자신을 발전시키고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 재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동료가 즐겨 말한 것처럼, 여러 면에서 저는 바로 이것을 설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