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1-5 주석

올해 교회력을 훓어보는 것만으로도 복음 선포자들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삼위일체 주일이 다시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신약학자인 베벌리 가벤타가 자신의 주석에서, “삼위일체 언급은 그 자체로 많은 현대 주석가들의 눈을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합니다”라고 언급하듯이 설교자들의 손에 땀이 나게 할 수 있습니다 . 적어도 우리의 청중 중 일부는 왜 삼위일체 교리가 중요한지, 그것이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본문에 대한 이전의 주석에서 썼듯이, 설교자들은 삼위일체에 관해 어떤 이단적인 것을 말할까봐 염려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쫓겨날 정도로 심각한 말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삼위일체에 대해 두꺼운 책을 쓴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킬만한 내용을 전하게 될까봐 걱정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 서신 본문을 전하는 이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이 본문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며,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신학적 논문을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로마서 5장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언급할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1절), “주 예수 그리스도”(1절)로 표현된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5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전하는 이들은 베벌리 가벤타로부터 몇 가지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 본문에서 바울이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아들], 그리고 성령이 서로 어떻게 작용하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시는지”에 대한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은유들은 역사 속에서 부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이미지는 지속되어왔습니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관계적인 본성입니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각 위격이 사랑, 섬김, 희생, 그리고 의존의 상호 관계 속에서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고백합니다.

로마서 5장을 설교하는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백성과의 관계를 확장하시는 방식을 어떻게 드러내는지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각 위격은 하나님의 의롭게 된 자녀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과의 관계로 이끄시는 일에 각각의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이번 주 서신 공과 또한 바울이 “하나님”이라 언급하는 삼위일체의 첫 번째 위격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인류는 하나님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는데, 우리 하나님으로서 뿐만 아니라 전우주의 하나님으로서의 정당한 자리에서 몰아내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기꺼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원수”(10절)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2절에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화평”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화평을 이루셨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일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삼위일체의 다른 위격과의 영원한 관계를 누리셨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하나님과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로 이끄셨습니다.

바울이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는 법정적 용어로서 피고인이 모든 혐의에서 무죄로 선고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칭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의롭게 된다는 것은 “마치 내가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해 주시는 것이라고 들으며 자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칭의”는 또한 닐 플랜팅어가 그의 책인 “Deep Down Faith”(CRC Publications, 2012)에서 새롭게 설명한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는 “칭의란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용서 뿐만 아니라 때로는 “외래적 의”(외부에서 온 의)라 부르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양된 자녀들을 의롭다 하실 때, 은혜로 우리의 본성적 불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대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플랜팅어의 표현처럼, 완전히 “거룩하고, 정의롭고 선한” 존재로 보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대해 주십니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믿음을 허락하신 이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은혜로 받은 이들을 삼위일체의 위격들 간의 관계를 불완전하지만 어느 정도 반영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부르십니다.

2절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에 대해 말할 때 삼위일체의 첫 번째 위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번역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영광을 “즐거워한다”는 것인지, “자랑한다”는 것인지를 놓고 논쟁합니다. 하지만 그 영광에 대한 바울의 초점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과 맺으시는 관계에 대한 강조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벤타가 언급하듯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백성 가운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의 예로, 출애굽기 24:16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모세가 올라간 시내산에서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때로 하나님의 원수들 앞에서 나타내신 승리의 임재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기에 성령이 거하시고 일하시는 이들, 곧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이미 지금 여기서 우리가 소망하는 그 영광을 맛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고대하며 소망합니다.

바울은 명시적으로 1절에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로마서 4:25에서 기록했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 죄를 위해 죽음에 넘겨지셨고, 우리 의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구원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인 그분과의 평화를 누립니다.

사도는 이번 주일 서신 공과에서 단 한 번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을 언급합니다. 5절에서 기록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그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들은 성령의 부어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성령이 은혜로 우리 마음에 거처를 삼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는 또한 3-4절의 중요한 “연쇄 반응”에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의 사역을 거의 확실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만이 고난을 소망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번 주일 서신 공과를 설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 어떻게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과 17장에서 확실히 드러나는데, 이번 주일 복음서 공과의 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 곳에서 삼위일체 다른 위격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두 번째 위격이신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서로 깊은 관계를 형성하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예화 

플랜팅어는 자신의 책인 ‘Deep Down Faith’에서 젊고 경험이 부족하지만 재능있는 도둑인 톰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단순히 플랜팅어가 말한 “영리하고, 빠르고, 대담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톰은 그의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직업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학교의 보조 관리인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책상을 닦고, 바닥을 청소하고, 책상을 정돈하는 일을 합니다. 그 일을 하는 동안 학생들의 사물함과 선생님들의 책상도 뒤져 물건을 훔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자기들의 물건들이 없어지는 것에 점점 더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분실된 물건들은 적은 금액이었지만, 한 번은 톰이 농구 경기에서 나온 사탕과 아이스크림 판매 수익의 상당 부분을 훔쳤습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한 10학년 학생이 자신의 사물함에 생일로 받은 돈을 넣어둔채 주말을 보내고 나서, 월요일 학교로 돌아와보니 그 돈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톰은 훔친 돈을 유익하게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는 반 친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옷을 샀습니다. 그의 부모님을 설득해 최신 스마트폰을 사게 했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학교 친구들을 위해 물건을 사주기도 했습니다. 그의 반 친구들 중에 그것들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지만, 어떤 친구들은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는 걸어가 버리곤 했습니다. 톰은 그가 갈망하던 인정받음을 결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목요일에 그는 건스트 선생님의 책상을 뒤지고 있었는데, 그 역사 선생님은 조용히 그 뒤에 나타나서는 그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톰은 건스트 선생님의 책상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고 변명하려 했지만 아무런 생각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플랜팅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건스트 선생님의 목소리 톤에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 것이 생각했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건스트 선생님은 모든 학생들이 좋아한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다 그를 존경했습니다. 그는 학생들과 농담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호했지만 공평했습니다. 처음에 톰이 도둑질을 들켰을 때, 거스트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점점 더 지치고, 초라하고,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건스트 선생님에게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톰은 모든 것을 실토했습니다. 톰은 물건을 훔친 이유가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중심에서 멀어진 기분 때문이라고까지 털어놓았습니다. 톰은 어울리기 위해 훔쳤던 것이었습니다.

플랭팅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건스트 선생님은 톰이 한 일에 대해 엄격했습니다. 톰은 확실히 잘못했습니다. 훔치는 일은 정당화될 수가 없습니다. 톰은 훔친 돈을 모두 되갚아 주어야 했습니다. 톰은 다른 방법, 올바른 방식으로 친구들을 사귀어야 했습니다.”

플랜팅어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다른 면에서 톰이 너무 비참해했고, 자신이 잘못되었으며,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건스트 선생님은 톰에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친절했습니다. 톰이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그가 마치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건스트 선생님은 행동했습니다. 건스트 선생님은 톰이 저지른 잘못을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톰 자체를 정당화했습니다. 즉, 그는 톰을 받아들이고, 그의 책상을 뒤진 일에 대해 용서했으며, 반 친구들과 화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플랜팅어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건스트 선생님은 마치 하나님처럼 행동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