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12-19 주석

컴퓨터나 셀폰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아내와 저는 겸허해집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에게 의존해 살던 우리 아들들에게 이제는 우리가 크게 의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테크놀로지 분야 있어서는 내가 결코 저희30대 아들들을 따라 갈 수 없다는 것을잘 압니다. 누군가 내게 테크놀로지에 정통인 아이들에 관한 강의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미 1960년대에 Margaret Meade 이라는 분의 강의인데  그분은 “예시적” (prefigurative) 문화와 “후시적” (postfigurative) 문화에 대해 말했습니다. “후시적”문화는 아이들이 어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고 “예시적”문화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배우는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Meade는 그녀의 저서인 Culture and Commitment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과거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난 잘 알아. 나도 너처럼 젊었을 때가 있었거든” 그러나 이제 젊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하지만  제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세상에서 젊으셨던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하실 수 도 없고요.’” 어른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Meade는 주장합니다. 그럴 때 아이들은 “방해받지 않고 막힘 없이 자유롭고 열린 미래를 향해 쑥쑥 잘자랄 것이다.”

오늘날 Margaret Meade의 견해는 순진하면서도 교만해 보입니다. 물론 그녀가 말한 다양한 세대차는 여전히 존재합니다.그러나 Meade는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꼭 해야 할 일에 대해 가르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가정했습니다. 그녀는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젊은이들과 열린 대화를 하고 젊은이들이 “미지의 방향으로 어른들을 인도”하도록 하는 것이라고생각했습니다.

Margaret Meade의 이름을 모를 수도 있지만,  오늘 부모 세대는 자녀에게 가르칠 것이 있다는 확신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십대들을 풀어주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일부 부모는 자녀가 사랑스런 가르침과 현명한 지도를 필요로 하고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을 잊고 “우리는 우리 자녀를 신뢰합니다”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의심이 든다면 청소년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 지나가보십시오. 부모를 놀라고 움츠리게 만들 수도 있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나 막상 부모에게 그것에 대해 물어본다면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그래서 뭘 어떻게 할 수있나요?”라고 수동적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Margaret Meade는 똑똑한 젊은이들이 순진한 노인들을 이끄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미래에 대해 썼습니다. 20세기 말까지도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활짝 열린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대화에서 테러리즘, 기후 변화, 소득 불평등과같은 것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두운 그림자가 쉽게 사라지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유태인 대학살을 덮었던 먹구름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다른 대량 학살들을 덮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대불황을 초래했던 무분별한 투자는 오늘날의무분별한 에너지 소비와 함께 경제적 어려움을 여전히 맴돌고 있습니다.

60년대에 제 친구들과 저는 학교가는 시간 외에 거의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숨바꼭질, 축구, 농구, 야구등을 하며 놀았습니다. 아무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거나 하지 않았고 부모님들이 우리가 만나 놀날짜와 시간들을 미리 계획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물론 아동 학대, 인종적 긴장, 냉전과 같은 것들이 우리 세대를 괴롭혔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21세기의 “활짝 열린 미래”가 그 때보다 더 나은 것으로 밝혀졌다는 주장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현 세대는 어떤 종류의 “자유롭고 활짝 열린” 미래를 만들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머지않아 훌륭한 지도자가 될 정말로 뛰어난 청년들로 교회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동시대인들이 이 세상을 경제적 붕괴, 무시무시한 폭탄들, 전염병및 더 많은 대량 학살의 미래로 이끌지 않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로마서 5장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온갖 놀라운 가능성으로 가득 찬 열린 미래를 축하하는 예배를 위해 모이지 않습니다. 대신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고대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해 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리석음, 잔인함, 파괴, 질병및 죽음의 순환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슬퍼하는 것처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2절) 함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사랑받는 백성은 한 사람의 죄가 우리 각자를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에게 어떻게 상처를 입혔는지 기억합니다.

물론,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우리 청년들이 혼전 또는 혼외 성관계나 올해 떼어먹은 세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죄”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일종의 악한 세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부모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심히 좋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악은 원래 우리 세상에 자리 잡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사촌인 “죽음”과 협력하여 악은 이제 날뛰는 바이러스처럼 세상에 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하시자 강력한 세력이 즉시 그분에게 도전하고 위협했습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신 중요한 한 가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결국 사탄과 죄와 죽음이 주장하는 영역으로부터 그들을 몰아내신 것입니다. 주리셨던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과 정면으로 맞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완전히 멸망시키려는사탄이 하나님께 아주 실제적인 대적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아담을 동산에 두어 그분의 선한 창조세계와 피조물들과 조화롭게 살 것인지, 아니면 그들로부터 소외되어 살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하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애도합니다. 아담은 죄로부터 자유롭게 살 것인지 아니면죄의 노예가 될 것인지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악이 우리 세상에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여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더우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후손들이 도덕적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정죄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차를 살지, 어떤 음식을 먹을지 선택할 수 있지만,  죄와 죽음에서 벗어날지 여부를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모든 아들과 딸들은 이제 어떤 식으로든 반역과 죽음가운데로 태어났습니다. 죄와 죽음이 우리를 본성적으로그들의 쇠사슬에 가두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활짝 열린 미래를 창조할 힘이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우리의 미래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과거와 많이 닮았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울의 메시지의 결론은 아닙니다. 감사하게도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열어주신 미래를 선포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불행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은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아담의 자발적인 불순종은 기꺼이 불순종하는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왔다면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순종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심판이 인간의 불순종을따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심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따랐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아담의 죽음은 로마서 5장을 선포하는 자들과 우리의 말을 듣는 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영적이고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탄과 사망의 모든 권세를 정면으로 부딪혀 성공적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분은 평생 동안, 특히 십자가에서 홀로 그들의 무자비한 공격에 맞섰습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따라서 어른 세대를 미래로 인도할 수 있는 아담의 새로운 아들이나 하와의 새 딸은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젊은이들 또한 본래 불순종했던 옛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미래로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만이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로부터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을 희망찬 미래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순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은 악의 권세 아래로 다시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딸들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죄와 사탄과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꺼이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 굴복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피조물들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당신을 고문하여 죽게 하는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기도하신 분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당신을 죽음으로 까지 박해하던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셨던 예수님의 길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Hutu족 Iphigenia의 남편과 그녀의 다섯 자녀를 잔인하게 죽인 남자는 Jean-Bosco라는 Tutu족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오늘날 Iphigenia는 Jean-Bosco의 아내 Epiphania와 함께 아름다운 바구니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살인범 과그의 아내와 같이 식사들 하기도 합니다.

Jean-Bosco는 Iphigenia의 가족 학살에 가담한 죄로 7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재판 중에 그는 학살을 자백하고Iphigenia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를 용서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Iphigenia는 가족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사실, 그녀는 4년 동안 Jean-Bosco와그의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침내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까? Iphigenia는 CNN.com에 “저는 기독교인이며 기도를 많이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죄와 사탄과 죽음이 여전히 극도로 강력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 그녀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Iphigenia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악의 세력이 우리 주변의거의 모든 곳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주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구원의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