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2-23 주석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제가 지난 수년 동안 지나쳤던 손수 만든 많은 광고판들은 다 그렇게 선포했습니다. 적지 않은 교회 표지판들도 이 약간 덜 좋은 소식을 자랑했습니다. 그것은 비기독교인들이 손가락을 흔드는 설교자나 다른 경건한 복음 전달자들로부터 듣게 되리라고 예상하는 그런 메시지입니다. 광적인 거리 설교자들이 길모퉁이에서 외칠 뻡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런 심판의 광고판을 든채 뒤집은 5갤런 플라스틱 양동이 위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공격할 때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6장의 맥락에서 읽으면 이 구절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합니다. 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구절이 어느 누구에게나 자신이 들어 본 최고의 소식은 아닐 것입니다. 이 유명한 구절을 다른 가능한 각도로 본다 해도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모든 암시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옥불과 유황보다 더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어쩌면 대부분에서—바울은 이름이 불릴 때 선포될 어떤 하나님의 심판을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단순히 관찰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세례 받은 신자들이 살아야 할 의로운 삶에 대해 주장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무언가의 노예이고 따라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주인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자유롭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자기 자신을 새롭게 재발명할 수는 있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독립적인 자유 행위자이자, 우리가 살아가면서 삶을 구성하고 신중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순간순간 우리의 재치와 지능에 의존하는 스스로 만들어진 개인으로 생각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최대한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거짓말이란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참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은혜 밖에 거하는 사람들은 중독자와 노예, 그리고 자신의 정욕과 변덕스러운 비도덕적·부도덕적 탐욕의 문화에 얽매인 종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의 독자들에게 “당신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십시오”라고 촉구합니다. “여러분은 식욕의 종이 되어 항상 그릇된 것을 너무 많이 먹고 마셨습니다. 술 취한 파티, 무자비한 향연, 아침에 찾아오는 숙취, 술에 취했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후회와 당혹감… 돌이켜보면 그런 게 자유처럼 보이나요?”

오늘날에도 벗어날 수 없는 ‘쥐 경주’에 휘말려 한탄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주당 70, 80시간을 일하면서도 그 이유를 잊은지 오래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자신을 위한 삶을 만들기에 몰두하기 전에 애당초 삶이라는 것을 먼저 가져야 하지 않냐는 질문에 답을 못할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알코올, 코카인 및 기타 약물에 대한 의존성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에서 치솟는 오피오이드 중독을 보십시오.

그런 다음, 누군가 개입 해서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들어보십시오. 전직 중독자들이 계속해서 말하는 첫 번째 말 중 하나는 무엇입니까? “드디어 내 삶을 되찾았습니다” 입니다. 그것은 전직 노예가 말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누군가 또는 다른 것에 의해 자신의 삶을 빼앗겼던 사람이 말하는 방식입니다. 사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이 중독 같은 것에 의해 완전히 집어삼켜진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오히려 그런 극단에 처하는 경우가 드물지만—자신의 부를 소유하기 보단 반대로 그 부에 소유당하는 사람들 차고 넘칩니다.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무엇이 안전한지, 은퇴 준비가 잘 되어 있는지에 대해 항상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는 다른 사람들의 격렬한 불안을 관리하는 데 경력을 쌓은 중개인, 재무 설계사, 증권 상담사 등은 떼로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서 6장의 마지막 줄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할 때 그는 예측이 아니라 관찰을 한 것입니다!

제가 9살쯤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그 당시 시골 농장으로 이사를 갔고, 부모님은 저에게 말을 사주었습니다. 실제로는 셰틀랜드 웰시(Shetland-Welsh) 조랑말 이었지만 “쉐도우(Shadow; 우리가 지어준 말의 이름)”는 안장을 착용한 적이 없는 조랑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조랑말에게 안장을 얹고 모든 것을 단단히 묶은 다음 저와 5살짜리 남동생을 그 말의 등에 태웠습니다. 글쎄, 쉐도우는 이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총알처럼 달려나갔습니다. 몸을 2 ~ 3 번만 튕겼을 뿐인데 우리 둘은 말등에서 속히 날아가 버렸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이 모든 것을 집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아버지와 이웃 사람이 우리가 괜찮은지 확인하기 위해 달려왔을 때 아버지는 그 이웃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장모님은 제 아내에게 이런 성경 구절을 말씀하고 있을 겁니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실제로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그녀는 이것을 예측한 것이 아니라 내 형제와 내가 땅에서— 쉐도우가 우리를 내동댕이 친—우리 스스로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사실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바울은 로마 세계의 풍경을 조사하고, 인간 대학살을 보면서, 그러한 당파적이고 통제 불능의 삶 자체가 언젠가는 실제적인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살아있는 죽음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만이 바울이 그런 수준을 넘어서 영원한 죽음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보고 있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하지만 결국 그것조차도 처음부터 지상에서 계속 일어났던 일의 연장일 뿐입니다.

바울은 조언합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 얼마나 더 좋은가!  그리고 바울은 그것이야말로 현재 로마교회 성도들의 신분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지난주 설교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당신입니다. 그렇게 행동하세요! 그리스도 안에서 의에 대하여 행복한 종이 되십시오. 왜냐하면—그리고 이것은 일상 생활에 대한 상식적인 관찰에서 그 자체로 입증되기 때문에—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대한 기쁨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머지않아 달콤할 뿐만 아니라 단기적으로도 하나님이 세우신 도덕적 울타리 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에서 번성하고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사실, 기독교인의 삶도 박해받는 삶일 수 있으며, 아무도 로마(와 다른 모든 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현실을 상기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신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다가오는 질병이나 비극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대로 거하면 사망이 아닌 생명에 이르고 절망이 아닌 기쁨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은 그 모든 선함에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지금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므로 그 선한 흐름을 따라 가십시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 말은 청교도적 정죄주의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 말이 사실이라고 설득이 필요 없는 지치고, 망가지고, 술에 취해 있고, 헤로인에 휩싸이고, 성적으로 망가진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들에게 한번 물어 보십시오.

예화 아이디어

로마서 6장의 바울의 마지막 말이 얼마나 잘 알려져 있는지에 대한 알고 싶다면 2월 2일자 《뉴요커》(New Yorker)에 실린 만화를 보면 됩니다. 만화는 먼저 3개의 요금소가 있는 고속도로를 보여줍니다. 맨 좌측 요금소에는 “현금”, 중앙 요금소에는 “하이패스”, 맨 우측 요금소에는 “죄의 삯”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요금소는 직원에게 돈을 지불하는 일반적인 창구가 아니라 커튼이 쳐진 천주교 교회의 고해성사 부스였습니다. 그리고 그 창구가 자동차가 향하는 유일한 “요금소”였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세속 세계에서도 죄와 같은 것이 존재하고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결과를 초래하며 조만간 우리 각자가 그 사실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습니다. 현금과 하이패스는 현재까지만 제공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