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12~17 주석

이 단락이 삼위일체 주일 설교 본문으로 선택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본문에 속한 여섯 구절 안에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난 주일 오순절 설교 본문으로 로마서 8장을 선택했다면, 오늘 본문이 지난 주일 본문보다 앞에 있기 때문에 로마서 8장을 거꾸로 설교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본문의 순서가 뒤바뀐 이유 역시 분명합니다. 이 구절들이 초대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작성할 때 사용된 주요 요소들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전체가 하나님에 관한 내용이고, 그 내용은 삼부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다른 이유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구원에 대한 서정적인 진리를 드러낸다는 점 때문에 영광스럽습니다. 교회 역사가 지켜온 정통 핵심 교리 중 하나는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지만, 세 위격이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완벽한 조화 가운데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세 위격은 결코 서로 상충되지 않으십니다.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이 하는 일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 뿐아닙니다. 세 위격은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완벽하게 협력하십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세 위격이 모두 필요합니다.

성자께서 성육신하신 것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이면에 아버지의 뜻이 있었고, 성령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과 가르침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희생에 대한 궁극적인 승인의 의미로 그를 죽음에서살리시기 위해, 또한 예수님께서,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사탄을 상대하고 죽음 그 자체(곧, 스스로 죽은 것)를 감당하기 위해 성부와 성령의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로마서 8장 이 부분에서 성령이 행하시는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신성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말씀하셨던 것들은 전적으로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주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진리를 여러분의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 누가 감히 그런 일을 할 수있겠습니까? 빛나고 거룩한 영광에게 다가가 “아빠, 안녕하세요!”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께는 말할 것도 없고,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서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가볍고 편안한 언어로 말을 건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초대 받지 않았다면, 세례를 통해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부여 받은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 안에서 독자들에게 우리가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지 계속해서 상기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바울의 말로만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우리 안에서 증거하시는 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계신 영입니다. “성령의 내적 증언”은 Calvin 신학의 주요 개념이었습니다. 주석이나 다른 책에서 이 개념을 언급할 때마다 Calvin은 여백에 “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 또는 약자로 “TSSI”라고 적었습니다. 그의 책 여백에 이런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핵심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런 진리와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라부르도록 초대받은 것 외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이 피조물 일반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만들어졌으며, 이것이 바울이 18절부터 계속해서 이야기하게 될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들은 탄생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내주하시는 영에 의해 이 창조의 토양과 우리 마음에 뿌려져 있는 희망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틀릴 수도 있지만, 굳이 추론해 보자면, 삼위일체 주일이 교회력에 있어서 가장 덜 기념하는 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크리스마스나 부활절과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승천절과 오순절조차 이 두 큰 기념일에 근접하기 어렵습니다. 주현절은 막 지나간 크리스마스에 초점을 맞출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더 많은 관심을 받을 지 모릅니다. 심지어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마저 교리적이고, 먼지가 많고, 학문적이며, 너무 복잡해 보이는 “삼위일체 주일”보다 더 많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나 여기 로마서 8장의 강력한 중심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왜 전문 신학자들이 무한히 숙고해야 할 상아탑 개념이 아닌지 서정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일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며, 소망이고, 깊고 깊은 기쁨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신 모든 부활의 원동력을 활용하고 그 모든 움직임과 에너지를 우리 마음에 바로 전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음을 확신시켜 줍니다.

그러니 삼위일체 주일에 이 내용을 설교하십시오. 삼위일체 하나님은 무한히 ‘pro nobis’, 즉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설교하십시오. 삼위일체의 지극히 풍성한 충만함에서 생명이 온 피조물에 넘쳐나고 영생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흐르고 흐른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십시오. 삼위가 한 분 되시고 한 분이 삼위 되신 것을 축하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한 신비이며 모든 기쁨의 기초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메시지에는 난해하거나, 먼지가 많거나, 학문적으로 답답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입양된 것을 축하하는 것은 우리가 끊임 없이 말하거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Richard Lischer가 자신의 책 ‘The End of Words’에서 말하는 어떤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게 된 이야기도 그러한 이야기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입양된 아이가 부모에게 입양을 둘러싼 이야기를 해 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그 이야기는 항상 동일해야 합니다. 그에 대한 어떤 누락이나 변화도 좋지 않습니다. ‘고아원에 있던 수많은 아이들 중 저를 선택하신 거, 맞지죠?’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모에게 지겨울 수 있을까요? 감히 다른 이야기로 대체하려 할까요?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반복적이라고 느껴 지신다면, 그 이유는 그 이야기가 원래부터 반복적이기 때문입니다. 성찬은 같은 방식으로 반복됩니다. 좋아하는 멜로디나 사랑의 몸짓도 같은방식으로 반복되고, 매일 끊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비도 반복됩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재미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나은 일을 합니다. 변함없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 그 이야기들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지만, 신실한 삶을 위해 그 이야기들을 나누고 듣는 사람들을 만들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