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22-27 주석

이번 주일 서신 공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에서도 많은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때때로 이런 신음 소리가 너무도 커서 구태여 듣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영어 성경이 ‘신음하다’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시스테네자이’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고통의 울부짖음이 어떻게든 하나로 합쳐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신음 소리는 적어도 ‘혼자서’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고통당하는 피조물과 인류의 합창입니다.

로마서8:22-27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신음에 대한 그들 자신만의 사례들을 찾고자 할 것입니다. 저는 선포자들이 전세계적, 지역적,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모두의 사례를 찾아보기를 권합니다.

물론 전세계적 팬데믹과 그것을 완화시키려는 노력으로 인한 신음 소리들은 사람들의 귀를 아프게 합니다. 전세계적 빈곤과 전쟁으로 인한 신음 소리들이 세계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음 소리들은 교회, 이웃, 직장, 학교 그리고 가정에도 울려 펴지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물 모두 다 “해산의 고통과 같이”(22절) 신음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조금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생생한 이미지입니다. 출산의 고통을 떠올리면 마치 나를 헤드락에 묶어놓고서 출산을 도와줄 의사를 불러달라고 소리치는 누군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사실, 출산 때 지르는 소리들은 적어도 신음 소리보다는 비명 소리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성경 학자들은 바울이 창조 전체가 신음하고 있다고 말한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말합니다. 확실히 사람들은 창조 세계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기후 변화와 대기, 토양과 수질 오염에 사람들이 적어도 한 몫을 했다는 것을 멀리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수없이 많은 생물들이 멸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를 명령하신 방식에는 처음부터 일종의 신음 소리를 내는 부패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를 둘러싼 논란을 잘 알고 있지만 일부 과학자들은 피조물의 죽음이 죄로 인한 첫 인류의 타락 이전에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사람들은 굶주릴 것입니다. 죽음은 사람들이 의존하는 많은 것을 생산하는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심지어 이 서신 공과를 선포하는 사람들이 피조물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예에 뉘앙스를 달리하고 싶을지라도 우리는 피조물 전체가 어떻게든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도의 주장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더글라스 무는 요한일서5장의 피조물의 신음에 대한 설명이 이사야 24:4과 예레미아 4:28이 말하고 있는 땅이 슬퍼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과 어떤 면에서 닮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바울은 피조물이 너무 깊은 고통을 겪고 있어서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어떻게든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큰소리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피조물과 피조세계 모두 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누가 그 원인을 제공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피조물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해 더 나은 날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 같습니다.

바울이 “해산의 고통과 같은 신음”이라는 은유를 선택한 것조차도 이 신음에 기대감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출산하는 대부분의 여성은 고통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이라는 놀라운 존재의 출현에 대한 기대감으로 신음합니다.

존 스토트가 말했듯이, 비슷한 방식으로 피조세계도 기다림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신음은 곧 나타날 놀라운 일, 즉 신음하는 이 피조세계를 포함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다시 오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물론 비참함 속에서 신음하는 것은 피조물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과 우리 모두가 만든 엉망진창으로부터 우리가 구원을 기다리는 것처럼 예수님의 친구들 역시 신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은유를 약간 바꾸면서도 유아기 이미지를 이어갑니다. 피조 세계는 출산의 고통처럼 신음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고통처럼 신음하고 있습니다.

마치 바울은 우리가 본래 고아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갈망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고아가 되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입양되기를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음’은 현재 피조세계와 인간이 처한 곤경에 대한 연대를 암시합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피조세계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주인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피조세계와 ‘같은 배’에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과 피조세계 모두 다 신음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은혜롭게 우리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우리의 최선이며 유일한 소망이라고 덧붙입니다. 무엇보다도 살아남기 위해 너무 바빠서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 것은 피조세계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구원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볼 수 있는 만큼 아직 그 소망을 명확하게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친구들은 아직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 구원이 다가오고 있음을 우리 안에서 증거합니다.

신학자 오드리 웨스트는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과 우리가 듣는 신음 소리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서 비롯된다고 지적합니다. 피조물과 피조 세계의 마지막이자 영원히 지속되는 소리는 고통이 아니라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될 것입니다.

피조세계와 피조물 모두 무력증에 걸렸고, 사실상 약하거나 아프거나 심지어 소심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행히도 바울은 26절에서, 우리에게 소망과 도움이 모두 있다고 말합니다. 오순절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림하신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사실, 오순절이 되면 많은 설교자들이 첫 오순절 이야기에 주목하지만, 로마서 8장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훌륭한 대안적 탐구를 제공합니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우리가 ‘성령’이라고 번역한 단어를 이 가장 유명하고 포괄적이며 사랑받는 장에서 22번이나 사용합니다. 더글라스 무는 그 중 20번은 아마도 성령에 대한 언급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친구들인 우리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연약하거나 아프거나 소심한 사람들입니다. 피조세계와 피조물의 필요는 너무나도 큽니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것들은 종종 너무 압도적이거나 복잡합니다.

감사하게도 바울은 성령께서 개입하신다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처럼 병들고 소심한 자들을 위해 직접 중보하십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말입니다. 그렇기에 신음하는 것은 피조세계와 피조물만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도 신음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중보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 다른 위격과 어떻게 중보할 수 있을까요?

저명한 신학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장황한 논문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주일 서신 공과를 설교하는 사람들은 이보다 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삼위일체의 위격은 너무 가까워서 서로 ‘신음’으로 소통할 때에도 서로를 이해하며, 효과적으로 인류의 필요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번 공과를 마무리하면서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친구들인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안다고 가정할 때에도 그것이 항상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은 특히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녀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성령은 은혜롭게도 우리가 잘못된 것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중보하십니다.

예화 아이디어

임종을 앞둔 사람들을 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임종시 가래 끓는 소리”라 부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더이상 삼키거나, 기침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목구멍에서 침과 점액을 제거할 수 없을 때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의사들은 임종시 가래 끓는 소리가 불쾌하지만, 그 소리를 내는 임종자는 대개 통증이나 불편함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임종시 가래 끓는 소리는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이를 목격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임종시 가래 끓는 소리’를 우리의 구속을 위한 신음 소리의 한 형태로 여긴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임종시 가래 끊는 소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의 완전한 입양을 열망하는 표현으로 여긴다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