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0:24-39 주석

존 돈느(John Donne)은 17세기 작가, 시인, 설교가입니다. 그의 시와 설교에서 돈느는 많은 명언들을 남겼습니다. “죽음아, 자랑하지 마라… 죽음아, 너는 죽을 것이다!”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결코 애쓸 필요 없다; 그것은 당신을 위해 울리니까.” “그 누구도 동떨어진 섬 전체와 같은 존재는 없다.” 존 돈느의 작품 전체에 이와 같이 매우 친숙한 대사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대학교 시절 영문학 교수님이 존 돈느의 작품을 친구에게 추천한 적이 있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교수님이 친구에게 돈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그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그는 좋은 작가이지만 너무 많은 상투적 표현을 사용해.” 글쎄요, 그게 정확한 이해일까요?

마태복음 10장도 비슷한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장의42구절에서 예수님은 기억에 남을 만한 말씀을 하나씩 쌓으면서 여러 언어적인 수사를 쏟아내십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려라

늑대 가운데 양들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참새 두 마리가 동전 한 푼에 팔린다너희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느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나는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얻으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누구든지 냉수 한 그릇을 준다면그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들을 한 최초의 분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면, 우린 그날 예수님께서 상투적인 언어 축제를 벌였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신약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구절들 중 일부입니다. 언뜻 보기에 이것은 다양한 속담이 뒤죽박죽 뒤섞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서 마태복음 10장 전체를 보면 (오늘 본문인 24-39절을 포함하여)

이 말씀들이 모두 이후 제자들의 삶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그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이후의 삶 말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묘사하는 모습은 불편할 정도로 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이 장은 충분히 행복하게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큰 권위를 부여하십니다. 그들에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선포할 희망적인 메시지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상황이 험악해질 때 맞서 싸우는 것은 그들의 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온화하게 그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냥 다음으로 넘어가라고 하십니다.

어떤 마을이 거칠게 굴면 그냥 다음 마을로 가라고 하십니다. 만약 체포된다면, 비싸고 능력있는 변호사를 부르지 말고 성령이 그들을 통해 말씀하도록 하라고 하심으로 현장 변호인을 붙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온유한 영혼과 사랑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전사가 되어서는 안 되며, 날카롭게 굴어서도 안 되며, 명백히 환영 받지 못하는 곳에서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그들의 삶은 그들이 선포하는 은혜의 복음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들의 태도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해야 합니다.

이 장은 비폭력적이고 사랑에 찬 복음 선포의 음률을 울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장의 나머지에서 놀라운 점은 예수님의 수사적 표현이 계속해서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소용돌이치며 하락한다는 것입니다. 전망이 꽤 빨리 암울해집니다. 제자들의 모든 사랑스러운 수사법과 부드러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구타 당하고, 체포 당하고, 거짓 고발을 당할 것입니다. 사랑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은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악마로 불릴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의 말은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둘러싼 의견 불일치로 인해 가족의 해체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충분히 놀랍지 않다는 듯, 예수님은 직접 당신께서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주러 이 땅에 오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부모님 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아들딸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참된 복음 증거자가 아닌, 그냥 거룩한 따라쟁이일 뿐입니다.

마태는 누가복음에서 천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이 땅에 평화!”로 표현한 부분을 안 읽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족관은 오늘날 선전되고 인기있는 것과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로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합니다. 복음이 왜 그렇게 미움을 받을까? 뭐가 그런 반응을 일으키는 거지? 일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갖는 부정적, 때로는 폭력적인 반응 뒤에 있는 것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일까? (그리고 예수께서 친히 이것을 예언했다면 오늘날 북미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사회가 복음을 반대하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충격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때때로 복음이 미움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글쎄요, 때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그리스도와 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합시다. 역사상 교회는 때때로 칼끝으로 처형의 위협을 가하면서 사람들을 회심시키려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중세 교황들은 마피아 유형처럼 자신들의 적을 암살하도록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에서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사건들 이외에도 다른 수많은 사건들 때문에 복음이 왜 멸시와 거부를 받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우리 자신이 복음의 내용과 반대되는 삶을 살 때 복음은 오염됩니다.

네, 분명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위선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좋은 소식을 신실하게 선포할 무고한 비둘기와 연약한 양이 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박해, 거절, 증오를 예언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최악의 교회뿐 아니라 최상의 교회도 배척당할 것은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가장 순수한 복음 선포의 핵심에는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한마디로 “순복”입니다.

복음의 심장 박동은 은혜와 사랑, 용서와 갱신, 소망과 기쁨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누군가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들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누군가가 사랑스러운 새끼 고양이와 강아지의 모습을 싫어하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어떻게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너무 귀엽지 않습니까! 또한 어떻게 복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랑과 은혜와 소망이 넘쳐나는데요!

그러나 사랑과 은혜와 소망 뒤에 있는 것이 사람들의 반감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예로 들자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당신이 흠 많고 죄 많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함을 깨닫기 전까지는 반감없이 좋게 느껴집니다. 물론 용서는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단어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이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일에 연루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추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가가 “댄(Dann), 나는 당신이 몇 달 전에 위원회 모임 끝나고 나에게 한 완전히 무례하고 부적절한 말을 용서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만약 댄이 자신은 그 모임 때 조금이라도 어긋난 말을 하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는 아마도 “용서? 그 용서 그냥 갖고 계세요. 난 원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거든요”라고 대답할 겁니다.

 

순복.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에 순복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부정하는 죄의 존재와 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아름다운 단어는 은혜입니다. 이 보다 더 밝게 빛나거나 너그러운 정신을 더 연상시키는 단어는 거의 없습니다. 이 말의 어원과 관련된 다른 단어들조차도 모두 긍정적입니다. ‘자비로운(gracious)’, ‘점잖은(graceful)’, ‘무료의(gratis)’, ‘감사함(gratitude)’, ‘감사합니다!Graciás’, 등등. 누가 은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어쩌면 자신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는 인간의 교활함, 개인의 기술과 성취, 또는 선한 삶의 총합이 하나님의 합격 점수를 받기에 충분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무력감, 마비, 부족함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막으려면 프로젝(Prozac) 약이 필요하거나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 보조와 약간의 복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수치감이 종종 실업급여를 받는 사람들, 즉 독립적(independent)이지 않고 의존적인(dependent)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 단지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약품이나 일부 정부 보조를 임시적으로 받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존재 전체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큰 수치심, 불명예, 의존의 짐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본문 요점

마태복음 10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구절은 예수님께서 가족 내에서의 큰 분쟁을 예언하신 36절일 것입니다. 그 구절은 미가 7:6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며 보통 각주에 그렇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미가서에 대한 예수님의 암시라면 더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미가서에서 이 내용은 이스라엘의 안타까운 상황에 대한 탄식의 일부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미가는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사회의 상황이 너무 나빠서 자신의 팔에 안긴 애인조차 믿을 수 없고, 재판관들은 모두 약탈을 일삼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으며, 통치자들은 부당하게 얻은 이득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급급하기에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잘못된 사회에 대한 탄식입니다.

그러나 미가 7:7에서 선지자는 이 탄식의 장황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끝맺습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즉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아들과 어머니를 대적하는 딸들과 사람의 원수들이 주로 자기 집안에서 일어나는 상황 앞에서 당신이 붙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오심—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한—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미가 7:6을 인용하시면서 가족 내 큰 분쟁의 슬픈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의 사역과 임재로 인해 발생할 결과가 아닌 도리어 정반대의 의미가 아닐까요? 곧 그러한 슬픈 현실 가운데로 임하신 예수님 만이 유일한 희망이심을 기대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하나님의 진정한 오심이 항상 놀랍고 신비롭다는 것을 우리에게 한 번 더 계시하는 구절이 있다면 미가 7:6의 반전이 바로 그 구절일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수년 전에 밀러드 풀러(Millard Fuller)라는 사람은 미국 성공 스토리의 정점에 꽤 가까웠습니다. 그는 일주일 내내 일하고 1년에 거의 백만달러를 벌어들이는 대기업 임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며 그의 삶이 너무 꽉 차 있고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내와 함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다시 헌신했습니다.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좀 더 수수한 집으로 이사했으며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가 다음으로 한일은 저소득 가정들을 위해 저렴한 무이자 주택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대부분 풀러가 시작한 Habitat for Humanity가 이룬 위대한 선행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설교자가 풀러의 이야기를 언급 했는데 예배 후 한 신자가 와서 물었습니다, “풀러가 그렇게 직장을 그만둘 때 그의 아이들은 몇 살이었습니까?” 이 설교자가 이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풀러라는 이는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이유로 어떻게 감히 그 아이들을 덜 편안한 생활방식으로 희생시킬 수 있었죠?!” 요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 을 따르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심지어 경제적으로도, 그 어느 때보다 인기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