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2~11 주석

작년엔 스타벅스의 컵이었습니다. 매년 누군가 크리스마스에 대한 조직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냅니다. 작년에 스타벅스가 빨간색 크리스마스 종이 컵에 메리 크리스마스 표시를 중단한 이후 일부 고객은 직원이 “크리스마스 씨를 위한 커피 나왔습니다”라고 말하도록 하기 위해 본인의 이름을 “크리스마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크리스마스”를 말하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일은 냉소적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매년 우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해피 홀리데이”에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년 중 지금 온전한 축제가 물거품 되거나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진실을 위해 일어서야 하고, 견고하고 확실하게 해야 할 때입니다.

글쎄, 아마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William Willimon이 그의 설교를 통해 처음 몇 분 동안 이에 대해 매우 유머스럽게 그러나 이어서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들어 볼 수 있습니다: https://cepreaching.org/audio-sermons/incarnation/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는 마태복음 11장에서 우리는 실제로 의심으로 가득 차고 이 계절에 대한 불확실성을 느끼게 하는 내용을 접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1장을 직관적이고 상식적으로 읽을 때 감옥에서 불행하게 썩고 있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보고 받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들은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것만큼 흥미롭지 않았고 극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장차 오실 메시아로 여겼던 요한은 자신이 역사상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를 저질렀는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자신을 방문한 제자 무리의 대표들을 보내어 예수께 직접 질문하게 했습니다. “당신이 장차 오실 그 분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혹시 더 나은 어떤 사람이 오시는 건가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수준 높은 의심이 결코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최근, 나는 어떤 선의의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이 택하신 요한은 당연히 의심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느꼈습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이유는 그로 인해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함이었거나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대면할 때 제자들이 던질 수 있었던 질문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모형으로 만든 성자는 항상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성자가 될 수 없다는 식입니다. 세례 요한은 항상 믿음이 굳건한 사람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의 얼굴은 스테인드-글라스에 묘사된 것과 다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인품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이 문제에 접근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을 ‘안전하고 견고한 믿음의 틀 안에 남겨 두기 위해’ 그의 제자들을 핑계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적어도 마태복음 11장에서는 말입니다. 질문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요한이었고, 예수님께서 답하신 대상 역시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어떤 것이 요한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그 분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하게 할 만큼 그를 실망시켰습니다. (나는 실제로 마태가 이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2절에서 그는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일을 들을 때에…”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이 마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처음으로 언급한 시점입니다. 요한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진정 그리스도라고 마태가 작은 암시를 던져 준 것입니다. 잘했습니다. 마태 사도!)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그리고 왜 렉셔너리의 대림절 본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까? 확실히 다른 여러 가능성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두 주 전에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7월 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 행사를 준비하면서 개척자들이 처음부터 영국에서 탈출하는 것이 옳았는지 시간을 낭비해 가며 숙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결혼 기념일을 준비하면서 일주일 내내 이 사람과 결혼한 것이 맞는 일이었는지 (결국 이혼을 해야 되는 것인지, 그리고 나서 전에 사귀었던 Linda는 요즘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알아보는…?!) 상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의심은 대림절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 필요한 시즌이며, 따라서 의문문이 아니라 직설법이나 명령문을 말해야 하는 때입니다. 어느 누구도 대림절 세 번째 주일에 (교회가 온통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져 있을 때) “우리가 지금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이 옳습니까? 혹시, 우리가 잘못된 구원자를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라고 묻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 본문을 좋아합니다. 나는 이 본문이 대림절의 일부가 되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예수님이 주님과 구원자 되신 것에 대해 더 많이 궁금해 하기보다 그 분처럼 행동하고 그 분을 따르는 것에 있어성공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하면 좋겠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요한의 의심스러운 질문에 대해 답하실 때, 예수님은 자신이 하셨던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기대했던 것과 달랐지만, (요한이 지옥불과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한 것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이 땅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가장 깊은 수준에서 천국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소망을 설교하는 것이 그다지 의미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권력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본디오 빌라도나 헤롯에게 한 방 먹이는 일들을 원하던 사람들이었다면 실망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무시되고 보이지 않는 “소자들”보다 누구에게 더 (예수님이 마태복음 18장에 가서 말씀하실) 소망이 필요하겠습니까? 팔레스타인의 모든 맹인이 눈을 뜬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가 눈을 뜨게 된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징조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모든 질병이 완치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 질병이 완치되었으며, 이 일은 장차 임하게 될 천국에서 이와 똑같은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시 성탄절을 축하하는 두 주 전이 되었습니다. 대림절 본문으로써 마태복음 11장은 교회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에서 우리가 어떤 것들을 하지 말아야 하는 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너무 자주 교회가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특종에 걸맞는 일에 관여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누가 누구이고 무엇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다른 길로 이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먼저 십자가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저항과 노골적인 박해를 예상하되 (충격을 받지 않아야 하는) 제자로서의 희생적인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최근 북미 교회들 안에 많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가지론과 무신론의 증가와 이슬람 사원 및 기타 다른 종교적 표현의 팽창이 교회와 (및 이른바 “기독교 국가”)의 패권을 몰아내려고 위협하는 것들을 두려워 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공적 사역이 묘사됨에 있어서 조금 더 세례 요한과 같이 되기 원하고 예수님의 방식과는 조금 다르기 원합니다.

여기 대림절 중반에 예수님은 요한의 의심을 가르침의 기회로 사용하여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민권이 있는 천국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유일하신 구원자인가 아닌가를 의심하는 데 있어서 요한과 함께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고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그분을 잘 따르고 있는지, 그리고 교회에서 대림절과 성탄절을 축하하고 그것을 장려하는 방식에 있어서 얼마나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와 질병에 걸린 자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조용하고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도록 부르심 받은 은혜로운 사역입니다.

텍스트 노트

마태복음 11장 2절에서 마태는 아주 탁월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그는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그를 단순하게 “그리스도”라 불렀습니다. 마태복음의 내러티브 안에서 마태는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두 번 밖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는 2장에서 동방박사가 헤롯 왕에게 “그리스도”가 태어난 곳에 대해 성경 학자들에게 묻도록 촉구했을 때였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부른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말입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의미 심장한 칭호를 던집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오직 그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에 삽입함으로써 마태는 세례 요한이 제기하려고 했던 질문에 미리 답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입니까? 예, 그렇습니다!’라고..

일러스트레이션 아이디어

어떤 것에 크게 실망한 적이 있습니까? 유명 식당에서 먹었던 음식 같은 것 말입니다. 오랫동안 유명 요리사의 요리를 맛보고 싶었지만, 실제로 먹어보니 정작 평범한 음식이었다든지.. 또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영화가, 아마도 여러분이 정말로 즐겨 보았던 영화의 속편이어서 다음 편이 나올 때까지 몇 년을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개봉일에 극장으로 달려가 그 영화를 관람했는데, 너무나 지루했다든지..

그래서 여러분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실망되었고, 위축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적이 있었다면, 문제의 음식이나 영화가 실제로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약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어땠는지 물어볼 때 여러분은 약간 석연치 않게 말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고 기대하던 대로였어요?” “네, 괜찮았어요. 그게, 음, 뭐, 상당히 괜찮았지요. 확실히, 나쁘진 않았어요. 아주 많이는요.”

그러나 여러분 마음 깊은 곳 있는 진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기다림이 헛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부엌에 있는 요리사나 카메라 뒤에 있는 감독 누군가 당신을 실망시켰고, 당신의 높은 기대를 산산조각 내버렸습니다.

세례 요한은 실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높여 드렸고, 구원이라는 쇼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를 높였습니다.

몇 년 전, 나는 Burbank, California에서 열린 “The Tonight Show with Johnny Carson” 녹화를 방청한 일이 있습니다. 녹화가 시작되기 전, 아나운서이자 보조 진행자인, Ed McMahon이 나와 관객들에게 농담조로 유머를 섞어 Johnny가 등장할 때 그의 말에 웃어 주라고 당부했습니다. Ed는 우리를 준비시켰습니다. 밴드 연주가 시작되고, 그가 그의 유명한 소개말인 “Heeeeeeere’s Johnny”를 말하는 순간 커튼이 갈라지고 Mr. Carson이 걸어 나왔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그를 본적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워밍업이었습니다. 그는 몇 년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했고, 드디어 사람들에게 ” Heeeeeeere’s Messiah!”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 커튼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걸어 나온 남자는 카메라 앞에서 수줍음을 탔습니다. 조명을 피했습니다. 원고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그는 외진 곳으로 도망쳤습니다. 요한은 청중이 실망했다는 것을 느꼈고,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요한이 이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제자들 몇 명을 보내 예수님에게 확인을 받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대답이 요한에게 다시 한 번 희망이 되었는지, 신약성경은 그의 공개적인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