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15-22 주석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에서 종교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지난  2020년 선거 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선거 때일 수록 그러한 것들을 확대합니다. 아마도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현상이 있을 수 있지만 미국은 확실히 이 분야에서 꽤진지한 대화의 진원지입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미국이 어떻게든 “기독교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또는 적어도 그렇게 시작되었다는) 낡은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동의하기 힘들다고 느끼는 새로운 사회 현상이나 법규가 나타날 때마다 국가의 모든 법이 어느정도 기독교를 반영했던 황금 시대로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은) 돌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다원주의적인 종교적관행이나 여러가지 난제들을 다루지 않고도 기독교인으로 남을 수 있는 쉬운 방법으로 느꼈을 수 도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종교적이 되는 것은 쉽게, 비종교적이 되는 것은 어렵게 만들고 싶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신앙인들이 이교나 불신앙처럼 보이는 것에 계속 부딪히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대체로 이교도 관습이나 철저하게 세속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별로 신경쓰시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마태복음 22장에서 문제가 되는 로마 정부는 종교적으로 중립적이거나 신앙을 돈독케 하는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북미의 기독교인들 대다수는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공개적으로 우상숭배하는 정부를 섬기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께서 20절에서 언급하신 동전에 새겨진 글이 신성 모독적인 명칭이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문제의 데나리온 동전에 티베리우스의 형상과 “신성한 아우구스도의 아들 가이사 티베리우스”라는 문구가 새겨 있었고 뒷면에는 “대제사장” 리비아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미국 동전의 문구가 아니었습니다. 공식적으로 가이사가 그 시대의 주였고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손에 그 동전을 쥐고 계시면서도 침착하게 모든 질문을 회피하셨습니다. 이교주의의 심볼로 여기며 던져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그 하나님을 모든 사람이 경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에 놀라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결국 이 기회를 통해 꽤 심오한 신학적 진리를 전달하십니다. 그 당시 로마는 가장 강력했고 Pax Romana는 알려진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제국의 영향력과 전능한 힘은 그 누구도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주후 70년 세금에 대한반란이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은 감히 가이사에게 대항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완전히 약탈되었고 유대교의 중심지인 헤롯의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깊고 심오한 현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마음이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것임을 알 때, 이 세상의 크고 빛나고 시끄럽고 찬란한 실체도 단순한 슬라이드쇼 와 방해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근접하지도 위협하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세상권력에 흥분하고 그것에 지나치게 집중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주권을 경시하고 과소평가하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 가이사의 동전을 손에 들고 어리둥절해 하는 질문자들 앞에서 그것을 들어 보이실 때, 그분이 어깨를 으쓱하고 눈썹을 찌푸리시며 이런 반응을 보이시는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게 전부야?이게 뭐 그리 중요한데 ? 아무 의미가 없는 거야! 내 아버지께서 여전히 영원하시고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어떤 인간의 힘도 그분을 몰아내거나 대체할 수 없고 우리 마음과 이 세상의 주인 되심도 변함없음을  기억해야 해.”

예수님의 설교들 중에 이 설교는 짧을 수 있지만 상당히 강력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노선을 따라 첨예하게 분열되어 있는 오늘 정치 시대에 예수님의 자신감 있는 자세와 하나님께 대한 일관되고 레이저 같은 초점은 우리에게 도전이 되고 더 나은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도록 부릅니다.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일련의 핵심적인 진실로의 부르심입니다.

텍스트 포인트:

마태복음 22:16 마지막 부분 헬라어 본문의 문자적 번역은 “. . . 당신은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입니다. 이 텍스트의일반적인 번역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 의미를 놓친 것일까요?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질문을 던졌던 이들을 “위선자” (hypocrites) 라고 부르십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위선자는 그 당시 말 그대로 배우였고, 당시 그레코-로마 세계에서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얼굴을 가리기 위해 가면을 썼습니다. 위선자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가면, 거짓된이면으로 숨기는 사람입니다. 위선자는 당신을 보고 웃으면서 아첨하는 말을 늘어놓지만 뒤에서 당신을 비웃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예수님이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으신다고 말하였는데 그것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공개적인얼굴을 의미한다면 그들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가면 뒤에 숨긴 사람들의 진정한 얼굴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그를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이 교활한 사람들을 호되게 대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진정한 얼굴을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단어는 “떠나다”(헬라어: apelthen)입니다. 이 작은 텍스트 세부 사항도 우리가 생각해 볼 무언가가 있을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놀랐고 이것은 합당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놀라움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해 놀랐을 때, 그것이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그에게서 몰아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슬픈 그림을 제시합니다.

여기에서 가능한 또 다른 연결은 예수께서 동전에 그려진 얼굴을 볼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모든 것에 진정한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시는 예수께서 동전에 그려진 얼굴에서 무엇을 보셨을지 흥미로운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몇 년 전 James Dobson과 John Woodbridge 이 Christianity Today의 지면에서 논쟁을 벌인적이 있습니다.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Dobson이 전투적 언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Woodbridge는 그러한 언어가 신자들을 눈멀게 하여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곳들을 보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예수께서 보여주셨고 신약성서에 성령의 열매로 기록된 온유와 겸손과 사랑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믿었습니다. Dobson은 대중 문화에 대해서 전투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침묵을 유지하는 것과도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간격을 넓고 깊고 위태롭게 만들고 싶어하는 깊은 인간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안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경건함을 시금석으로 테스트하듯 측정하여 외부의 크고 나쁜 세상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적절하게 적대적이고 부정적인지 확인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 가이사, 세금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우리로 잠시 멈춰 생각하게 합니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반응은 어때야 할까? 예수님처럼 더 자신감 있고 신앙에 입각한 자세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가 애초 전달하고자 하는 주님안의 소망과 신뢰와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