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3:20-35 주석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  이 속담의 이면에는 때때로 우리가 한 가지 일에 너무 매몰되어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때때로 이것은 유머를 자아 내는 상황을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넥타이를 매듭짓는 데 집착하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넥타이가 완벽하게 매어지고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면서 거울 앞에서 지나치게 많은시간을 보냅니다.  이제 외모가 보기 좋다고 만족한 그는 집을 나섭니다. 그런데 바지 뒷부분이 크게 찢어졌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로 걸어 나갑니다!

올바른 각도에서 보면 마가복음 3장과 관련해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을 읽고 소위 “용서받지 못할죄”를 영혼 깊은 곳까지 초조해 합니다.  우리는 그 죄의 정확한 윤곽이 무엇인지 걱정합니다.  우리가 아는 누군가가 그런 죄를지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합니다.  우리 자신이 실수로 바로 그 죄를 지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우리 설교자들은 “여러분이 이 죄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이 죄를 짓지 않은 증거입니다.”라는 전통적인 대사를통해 이 문제를 다루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또는 이 가장 위험한 죄가 단회성 범죄는 아니라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가이처럼 영원히 끔찍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사람이 단 한 순간도 주님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철저한 반신앙적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설교자로서 이 문제를 목회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어떻게 다루든, 요점은 많은 사람들이 이 장의 다른 모든 부분을거의 배제할 정도로 이 특정 부분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3장에는 예수님에 대한 두 가지 거부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용서받지 못할 죄의 안팎에 집착하게 되면, 마가복음 3장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또 다른 불행한 방식과 그러한태도를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음을 간과할 수 있습니다.  이 다른 거부를 보려면 예수님의 가족과 그 역할을 살펴볼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아직 예수의 제자 무리의 일원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예수를따르고 있었지만 더 중요한 제자도의 의미, 즉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따르기 보다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내기위해 그를 염탐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추종의 결과는 끔찍한 결론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족에게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고, 대중의 눈에 띄지 않기를 열망하는 광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집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히고 한동안 조용히 재운 다음 귀신이라던지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이 모든 이상한 이야기가 잠잠해 질 지지켜보고 싶어 합니다.

일부 주석가들이 지적했듯이, 특히 예수와 귀신과의 교전이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을 가장 염려하게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조금 기괴해 보였습니다.  21절에서 그들은 문자적으로 예수님이 “엑스테스테”라고 말합니다. 즉 자기 밖에서 있다는 뜻의 단어이기 때문에 그를 집으로 데려가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슬픔에 빠져 감정적으로 엉망인사람을 “자기 자신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누군가가 자신의 감각을 떠났거나 감각이 그를 떠났기 때문에 당분간 남은 것은 감정이 통제되지 않고 조절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가족들의 평가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대한 예수의 모든 이야기는 가족들에게 예수가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보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했고,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을 직계 가족으로 둔다는 사실을 감당해야 했던 적이 없었으니, 그 가족의 반응도 어느 정도는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을 망상적이고, 부정확하고,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것도 꽤나 나쁜 일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가 때때로 가담하는 죄일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 중에서 어떤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비유에 지나지 않거나 현대에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할지 스스로 결정할 때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예수님이 때때로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하셨다고 말하고 있지않나요?  마가복음 3장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방법이 실제로 여러 가지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때때로 작은 것 처럼 보이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겠고 큰 것에 대한 과도한 걱정이 작은 것을 가리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 경우 나무 때문에 놓칠 수 있는 숲은 정말 중요한 숲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본문 요점

설교자들은 때때로 당면한 본문에 좁게 초점을 맞추느라 더 넓은 맥락을 놓치기 쉽습니다.  마가복음 3장에 나오는 이 구절의 경우, 마가가 이 사건을 둘러싸고 설정한 틀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가는 이런 방식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를 중간 삽입 또는 마가의 샌드위치 방식이 라고 부릅니다).

이 본문 전 마가복음 3장 13~19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이후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전령이 될 ‘보냄 받은 자’로서 사도로 임명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사건 직후, 우리는 마가복음 4장에서 복음의 씨앗이 필연적으로 여러 종류의 토양에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그 중 대부분은 (아쉽게도) 그 씨앗의 성장과 번영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판명될 것임을 상기시키는 잘 알려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만나게 됩니다.

이 두 사건 사이에 예수의 가족과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끔찍하게 거부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제자이자 사도인 이들이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나아갈 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리 보고 싶다면, 주님이시자 스승이 여기서 어떻게 대접받았는지보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화아이디어

마가복음 3장의 핵심 질문은 소위 용서받지 못할 죄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것은 어둠이 빛이고 빛이 어둠이라고세상을 도덕적으로 뒤집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평범한 죄가 아닙니다.  사소한 실수나 순간적인 판단착오로 인해 이런 식으로 살고, 이런 식으로 말하고,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신성 모독의 본질입니다.  신성 모독은결국 절도의 한 형태입니다.  신성 모독자들은 거룩한 언어와 상징을 훔쳐서 추하고 끔찍한 것들과 연관시킴으로 하나님이 선택한 계시의 형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할 기회를 빼앗습니다.  따라서 예를들어KKK집단이 십자가의 상징을 실제의 의미(즉, 모든 인종과 하나님과 전 세계 사이의 화해의 표시)가 아닌 인종적 증오의 상징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방법의 핵심 부분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그 은혜를 독약처럼 거부하기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