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3-9 주석

첫째 아들이 태어난 후에는 아내와 제가 첫 유언장을 작성할 당시에는 물질적 자산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유언은 대부분 우리가 아이들보다 먼저 죽는다면 누가 우리 아이들을 돌볼 것인지를 다루었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우리가 죽을 때 누가 무엇을 물려받을 것인지에 대한 지침을 포함하도록 유언장을 수정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물려 줄 것들이 아직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집을 소유하지도 않았으며 우리의 생명 보험으로 인해 아무도 독립적으로 부자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한 재정 설계사는 아내와 나에게 장기적인 재정적 안정을 제공하기 위해 “최고의 속도를 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약간의 투자를 했고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금융 투자는 항상 위험합니다. 수익 잠재력이 가장 높은 일부는 손실 위험도 가장 높습니다. 상대적으로 위험이 낮은 투자는 특히 높은 배당금을 산출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명한 투자자는 투자한 금액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를 잃을 여유가 있는지 항상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투자가 얼마나 안전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러나 안전은 현재 공급이 상당히 부족한 것 같습니다. 주가가 급락했습니다. 물질적 상속이 축소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투자자” 그룹에게 첫 번째 편지를 씁니다. 그는 ‘상속’ ‘금’ 같은 투자 이미지까지 사용을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 베드로의 편지를 들은 투자자들은 아주 극소의 물질적 보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속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떻게 물질적으로 가난한 청중을 불러 서신교과의 찬양 찬송을 부르게 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결국, 일부 독자들의 상황은 그러한 찬양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 안에서 베드로의 입양된 형제 자매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얼마나 빨리 사라질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 가운데 사도는 3절에서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산 소망이 있게 하시고 썩지 아니하며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입양된 아들들과 딸들에게 완전히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유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중심에는 ‘중생’과 ‘산 소망’이라는 두 단어와 ‘상속’이라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핵심 단어는 “상속”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거듭남”이 결국 그가 3절 끝 부분에서 쓴 “기업”으로 “산 소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지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은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들이 9절에서 우리 “영혼”의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을 물려받을 것임을 생각나게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유업은 하나님과의 자연스런 적개심에서 우리를 하나님이 구출하심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평화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사함을 하나님의 입양된 아들들과 딸들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극히 사랑받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웃과 하나님의 창조물과의 회복된 관계도 “상속” 받았습니다. 우리의 “상속”은 우리가 새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안에서.가장 온전한 삶으로 받게 될 구원입니다.

물론 그 유산은 우리에게 어린 사촌 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옷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는 양말이나 셔츠와 같은 선물을 받으면 어깨 너머로 던지고 더 재미있는 선물로 넘어 갑니다.

우리는 당연히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선물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물질적 상속도 우리보다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대조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지금 하나님과, 서로, 그리고 피조물과 함께 평화를 누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다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사랑하는 백성은 첫 번째 부활절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기 때문에 그 모든 생명을 물려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육체적으로 무덤에서 걸어나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모든 사람을 은혜롭게 포함시키십니다.

그러나 두 가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우리의 구원인 유업의 안전에 의문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통의 사나움입니다. 사도는 6절에서 “온갖 시험으로 말미암아 근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암시합니다. 그는 또한 “불로 연단”된다고 언급합니다.

예를 들어 인도 기독교인들이 격고 있는 시련들은 국제 기독교 우려(International Christian Concern)가 “박해의 급증”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처하면서 견디고 있습니다.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 광범위하고 반복적으로 핍박하는 케냐 기독교인들이 걷고 있는 불길입니다. 그러나 온갖 시련 속에서 슬픔을 겪는 것은 다만 해외 기독교인만이 아닙니다. COVID-19가 부과하는 고통은 분명히 기독교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지만, 팬데믹과 그것에 배어든 모든 불확실성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가족의 위기, 건강상의 위협, 재정적 어려움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십시오. 정신 질환, 외로움, 두려움, 걱정이 우리 중 일부를 포위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는 유독한 관계를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집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현재 겪고 있는 추가적인 학대와 방치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 고통의 첫 번째 결과 중 하나의 질문은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가족에서 ‘쫓아낸’ 것인가?” 즉, “나의 구원인 나의 하늘의 유업이 여전히 온전한가?”

딱딱하고 늙은 Larry는 우리의 하늘 유업의 신뢰성에 대한 두 번째 도전을 구현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데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Larry는 죽어 가고 있었고 그것은 분명히 그를 무섭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그를 위로하려고 저를 집으로 불렀습니다. Larry가 일으킨 대학살의 소리 없는 흔적이 그의 주위에 널려 있었습니다. 사실상 그에게 남은 것은 딱딱한 껍질뿐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세례를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셨다고 계속 말했습니다.” Larry의 아내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 저는 Larry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할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학생 목사로서 Larry에게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온갖 해를 끼쳤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 남자는 손을 떨고 턱을 떨며 거기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양자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베드로가 2절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기독교인들은 때때로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만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혼”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더 합당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셨습니까?”

가장 이상한 부활절 이후의 이 이상한 첫 번째 주일에 고통받는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업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하늘의 유업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들이 현재의 불확실한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까?

4절에서 베드로의 당당한 대답은 “네!!”입니다. 우리의 유산은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양된 형제 자매들은 신실함, 친절함, 순종함으로 우리의 구원을 지키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지 못한다고 그것이 자동적으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니요, 우리의 구원인 유업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보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하나님의 양자의 유업이 사라지거나 시들거나 물에 가라앉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구원을 바꾸거나 낭비하거나 파괴할 수 없습니다.

죽어가는 부모가 상속 재산을 낭비할까봐 걱정하는 사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유언장에는 그녀가 매달 그것의 아주 작은 부분만 받게 된다는 것을 명시하였습니다. 무덤에서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녀에게서도 그녀의 유산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물질적 유산을 낭비할 수 있지만 하늘의 유업은 낭비할 수 없습니다. 결국 보관하거나 소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양자의 유업을 우리를 위하여 지키시되 우리로 부터 지키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한때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개혁파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우리가 하늘의 유업을 낭비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고 추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입양된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신실하게 받는 사람들은 하늘의 유업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기독교 믿음의 상실에 대해 우리가 평생 동안 해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신비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들은 주님을 등진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사랑의 후원자이신 그리스도의 못 박힌 손에 맡깁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우리의 구원이라는 유업의 보증이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6절에서 말하는 “모든 시험으로 근심”하는 고난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기쁨을 행복으로 착각하지 않습니다.

시련의 슬픔은 건강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얼굴에서 만족과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의미의 일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구원인 유업의 확증임을 배우며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와 만족은 예수님의 입양된 형제 자매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를 베드로가 1절에서 “세상에서 나그네”라고 부르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사실, 그의 첫 번째 편지 전체에서 그는 우리의 유업이 어떤 면에서 그것을 공유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킨다고 제안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과 세계 모두에 대해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관점은 우리를 더 낫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문화와 약간 다르게 만듭니다.

예화 아이디어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는 웹사이트에서 스스로를 “예금을 보장함으로써 국가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과 대중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의회가 만든 독립 기관”이라고 부릅니다. FDIC는 무엇보다도 미국 금융 기관을 조사하고 감독함으로써 이를 수행합니다. 그것의 웹사이트는 심지어 “1933년 이후로 어떤 예금자도 FDIC 보험 자금을 한 푼도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자랑합니다. 따라서 보험에 가입된 금융 기관에서 나오는 물질적 상속은 적어도 합리적으로 안전합니다.

그러나 물론 다른 물질적 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는 아닙니다. 최근의 사건이 전 세계 금융 시장을 강타한 것만은 아닙니다. 또한 전문가들이 거듭 상기시켜 주듯이 “과거 성과가 미래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정 자문인들은 투자자가 최근의 “성과표”가 아니라 건전한 전략에 따라 올바른 투자 결정을 내리도록 권장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하늘 유업과 비교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과거의 행적은 하나님의 미래의 “결과”에 대한 하나의 보증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우리의 하늘 유업을 보장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