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3:8-15a 주석

우리는 일반적으로 “유언장”을 죽은 사람이 자신의 소유물을 나누어 주는 건조한 법적 문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인의 마지막 생각을 전달하는 일종의 유언인 유언장에 대해 주기적으로 보게 되거나 듣게 됩니다.

때로 그 말들이 과거의 죄에 대해 가족들을 꾸짖기도 하지만, 화해에 대한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드러낼 때도 있고, 죽은 사람의 과거를 기억하기도 할 때도 있지만, 미래에 대한 바램을 드러낼 때도 있습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이 자신의 청중들에게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면 무슨 말을 남기고 싶은지 물어볼 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두 번째 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면서 이 점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편지는 사도가 남긴 일종의 유언장입니다. 베드로후서 1:15은 적어도 그가 자신이 곧 일생을 마칠 것으로 생각한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서신의 모든 말들을 신중하게 생각합니다. 이 마지막 말들에서 그는 사도들을 포함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마지막을 맞고 있는 상황인데 예수님이 다시 오지 않고 계신 것을 확실히 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은 베드로가 그의 편지에서 “마지막 일” 곧, 세상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에 놀라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일차 청중만 아니라 이차 청중인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마지막 일들을 숙고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오시지 않더라도’, 실제적인 의미로 볼 때, 우리가 죽을 때 우리 각자를 위해 오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이들의 말을 통해 그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록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인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준비시키십니다. 새 창조는 육체의 죽음을 넘어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실현되는 곳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은 대림절 기간에 공부할 훌륭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사도는 삼십 년이 지난 후에도 예수님이 여전히 오시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염려하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이 본문을 썼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그의 독자들에게 상기시킵니다. 본문 8절에서 그는 “주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라고 씁니다. 우리가 가끔 가정하는 것처럼 곧 돌아 오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도록 그들을 이끄시려는 그의 인내를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재림의 시기에 대한 이 구절이 베드로 시대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면, 베드로전서 3장을 선포하고 듣는 사람들 모두에게 더욱 걱정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우리의 천 년을 하나님의 하루에 비교한 것은 아마도 과장된 표현일 것입니다. 하지만 수천 년이란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과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다시 돌아 오시기 위해 천 년 이상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올해의 대림절 사이에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여전히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그의 영으로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심을 기억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적인 의미로 볼 때,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신 것을 통해 이미 다시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오랜 기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 왔습니다. 여전히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따라서 실제적인 의미로 볼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이미 기뻐하고 있는 것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서신서를 쓴 이유는, 우리가 영광스러운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지만, 지금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관계 속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 지나치게 몰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의 구원 속에서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본문 9절은 아무도 멸망 당하지 않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든, 이 구절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본문 15절이 말하는 “구원”에 이르도록 예수님의 “지연”을 선용하라는 일종의 초대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전서 3장을 선포하고 듣는 모든 이들은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과 다른 하나님 나라 일꾼들의 사역들을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고 있는 동안 우리의 시간은 의미를 가집니다. 헛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베들레헴과 아마겟돈 사이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떠도는 것이 아니라, 본문 11절이 말하고 있는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감으로 우리의 시간을 최대한 유익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모든 방법 중에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적습니다. 베드로는 새로운 창조에 대한 언급으로 전환하기 전에 첫 번째 창조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우리에게 어떤 중요한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땅에 평화”라고 한 천사의 메시지는 다양한 사람들에 여러 의미를 남깁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들 대부분이 그 의미를 고민할 때 이 땅을 “위한” 평화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에서 성령은 베드로의 생각이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언젠가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본문 10절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모든 것을 파괴하실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이 꺼지고 연기가 걷히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이 천상의 구름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남게 될 것입니다. 새 창조는 본문 13절이 말하는 “의가 있는 곳” 또는 유진 피터슨이 생생하게 번역한 “의로 조성된” 곳이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을 선포하고 듣는 모든 이들이 고대하는 고향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경건한 삶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축하하고 돌보는 것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초목과 산봉우리와 강과 폭우 같은 것들을 즐기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또한 우리는 공기와 물과 식물들과 동물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을 애정을 갖고 돌보는 것에 우리의 시간을 사용합니다.

대림절은 밤 하늘에 춤을 추는 천사들과 동쪽에서 반짝이는 별들과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와 같은 기이한 일들을 생각하게 되는 때입니다. 심지어 공원들과 가게들과 이웃들을 환상적인 크리스마스 성지로 바꾸어 축하하려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일시적입니다. 천사들과 아기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 안에 있습니다. 밝은 빛과 푸르른 나무들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해 또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계속해서 존재할 것들에 대해 집중하려 노력합니다. 우리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매일 우리 마음에 살아 계시지만 곧 만물을 새롭게 하기 위해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형제와 자매들은 계속해서 존재할 것들의 관점에서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갑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오신 것은 만물의 갱신에 대한 신호만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의 갱신도 여기에 포함합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말한 것처럼, 미래의 어느 날,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창조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의 삶은 인생의 각 부분이 그분의 임재와 그의 성령에 의해 드러나는 일종의 “깜짝 공개”입니다. 심지어 현재의 우리는 사람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완전한 의의 집을 보여주는 “의의 집”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Arthur Miller가 쓴 Death of A Salesman에 나오는 Willy Loman은 지난 70년 동안 작품에 등장했던 가장 비극적인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거의 치료 불가능한 낙천주의자인데, 밝혀진 것처럼 낙천적인 구석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Happy가 Willy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가 뭔가를 기대할 때만큼 행복한 때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