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관찰, 그리고 질문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자 하는 경건한 사람에게 영적인 충격보다 더 큰 충격은 거의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에게 물어보면 알 것입니다. 그는 이런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의 종교적 관습과 금기 사항과는 달리(이를 깨뜨리면 큰 충격을 받고 심하게 흔들리는), 깨끗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관한 하나님의 율법은 성경 자체에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관람이나 카드놀이에 관한 청교도법(오랫동안 개혁주의 전통에서 지켜왔고, 다른 전통에서도 공유하는)은 특정 성경 구절이 아닌 성경의 다양한 원리에 근거해서 나온 항목들입니다. 하지만 정결 유지에 관련된 규칙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레위기 성경을 펼쳐서 베드로와 당대 유대인들이 왜 먹고, 먹지 않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유를 장과 절로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0장의 지붕 환상에서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규율을 깨뜨리라는 명령을 하셨을 때, 그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그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도대체 이거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의 머리는 누군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핑핑 돌았습니다. 고넬료라 불리우는 로마 백부장이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찾고 있었고, 베드로가 정중하게 그들에게 가라고 말하려는 순간,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보낸 사람들이니, 너는 그들과 함께 즉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가이사 마을”이라 불리는 가이사랴로 떠났습니다. 도시 이름 자체가 가이사를 연상시키기에, 베드로와 같은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혐오스러운 이름이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베드로는 이방인을 피하거나, 적어도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그들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베드로에게 너무도 뿌리가 깊어서, 사도행전 10:27에서 고넬료 집에 들어간 그는 좀처럼 내뱉을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어울리는 일은 불법인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로 여기에 오게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왔을 뿐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베드로는 많은 것을 배웠고, 이번 부활 주일 공과가 증명하듯이, 매우 빨리 그것을 습득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베드로의 설교에서 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과 우주 전체를 변화시킨 것임이 분명해지기 때문에 훌륭한 부활절 강해입니다.
하지만 그 날에 성령께서 이방인들에게 오셨으며, 부활 이후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된 것을 베드로에게 확신시키셨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전에 유대인으로 개종되어야 한다고 한동안 계속 믿게 될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와 바울은 결국 이 문제로 초대 교회의 가장 유명한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정결의식을 지켜야 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바울은 그러한 요구가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은혜로 주시는데 있어서 그와 같은 의식들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면 왜 다른 이들에게 그런 요구를 해야 할까요? 결국, 바울은 그 논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베드로의 머리와 마음에 스며드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그렇게 될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그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세리와 식사를 하시고, 창녀들에게 친절하게 말씀하시던 그 모든 순간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연결짓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 산파가 이방인 아이를 받아주어서는 안된다는 시대에 살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은 생명의 땅에 또 하나의 더럽고 천한 이방인을 들여놓는 죄를 짓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방인 아이를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하나님께서는 진정 은혜로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성령께서 사람들 안에서 드러나기 시작하면, 남은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서로와 함께 나누는 근본적인 연합을 기뻐하고 축하는 것 뿐입니다.
사실, 이 기본적인 교훈은 하나님께서 늘 가르치시던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사도행전10:5에 기록된 아주 작은 요소 하나가 이 단락 전체를 여는 열쇠가 됩니다. 이는 놓치기 쉬운 부분이지만,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우리가 성경적에 정통하고 해박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그 작은 요소는 베드로가 환상을 처음 받은 도시인데, 욥바입니다. 성경 전체에 욥바란 도시를 언급한 단 두 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10장에 있고, 다른 하나는 요나 이야기입니다.
요나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니느웨라는 사악한 이방인 땅에 가서 회개를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아 욥바로 도망친 선지자였습니다. 요나는 구원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허락된 것이라 믿었기에,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설교를 하고 그들이 실제로 그 설교에 긍정적인 반응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던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욥바로 도망친 것입니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 베드로도 욥바에 머물면서 요나에게 주었던 교훈과 같은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모든 장소,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하나님의 열망은 모든 장소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이들로서 우리가 할 일은 그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대, 규칙, 인종적 편견으로 이 일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더하심으로 그의 몸인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것을 볼 때에, 우리의 임무는 즐거워하고 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로 보이는 많은 이들이 교회에 더해졌을 때,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과의 연합은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부활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에게 임했다면, 베드로가 오래전에 했던 것처럼, 우리의 일은 다양성 속에서 우리의 연합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일이기에, 그리고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다함께 외쳐야 하기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은 이 이야기가 시작될 때, 베드로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로 끝맺습니다. 고넬료와 그의 가정에 세례를 준 후 베드로는 더 머물기를 요청받았고, 며칠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냅니다. 이방인들과 함께 자고, 그들의 이방인 식탁에서 함께 먹습니다(프레드 크레독의 말을 빌리자면, 당신은 베드로가 햄과 페퍼로니 피자를 먹는 것을 상상할 수가 있나요!). 베드로는 그렇게 했습니다. 베드로를 처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바꾸어놓으신 성령께서 종종 이후에도 수많은 작은 변화들을 이끌어내십니다.
우리가 부활 주일에 말하듯이, “그분이 살아나셨습니다! 진짜 부활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이 복음은 은혜와 진리 안에서 계속해서 전진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놀라운 일들도 있었습니다.
참고: 사순절과 고난 주간을 위한 C년도의 특별 웹페이지가 지금 이용 가능합니다. 추가 설교 아이디어, 설교 예문 등 다양한 자료를 보시려면 이 자료 페이지를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화 아이디어
사도행전 10장과 누가복음 24장을 연결한다면-양쪽 다 부활 주일에 사용할 수 있는 교회력 C년도의 개정된 공동 공과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베드로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으로 드러납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하필이면 이탈리아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사도이고, “보냄을 받은 자”라면, 자신이 어디로 가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24장에서는 베드로가 빈 무덤에서 상당한 혼란 속에 배회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와 동료 제자들은-누가복음24:10에서 누가는 아마도 약간의 빈정거림으로 그들을 “사도”라 불렀지만-빈 무덤 이야기와 천사들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여인들이 이것을 그들에게 전달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전부 “헛소리” 라고 치부했습니다. 그러나 헛소리든 아니든, 베드로는 적어도 무덤으로 가서 직접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그가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이 그에게는 말도 안되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사도행전 10장에 와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빈무덤 앞에서 혼란스러움으로 방황했던 사람이 이제는 담대하게 부활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일축했던 그가 이제는 고넬료와 그의 가정에 가서 이 복음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가장 숭고한 하나님의 지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머 감각이 있으십니다. 누가복음 24장의 제자 베드로를 사도행전 10장의 사도 베드로와 나란히 놓아보면, 하나님의 기지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도행전 10:34-43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