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34-43 주석

이 (구약 성경?) 본문에서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어떻게 부활하셨는지에 대한 원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한 로마 군인에게 다시 말해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부활주일 설교를 통해 부활의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면 복음서 본문을 택하시면 되고, 고대와 현대 교회에 미친 부활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면 이 짧은 버전의 이야기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베드로가 그 로마 군인에게 설교할 때 교회의 사명의 형태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이제 막 시작된 어린 교회에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누가는 교회가 예수님이 명령을 따라 정확하게 어떻게 성장하고 있었는지 추적하고 있습니다. 누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이 장에서 복음이 가이사랴에 있는 이스라엘의 가장자리에 도달합니다. 맞습니다. 한 집사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설교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약간 예외적인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수석 사도가 로마 제국의 한 관리에게 교회의 미래와 사명에 대한 매우 분명한 함의를 가지고 설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새롭게 회심한 바울을 “이방인들과 그들의 왕들에게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해 내가 택한 도구”(사도행전 9:15)로 지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이방인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설교하게 하십니다.

이 이야기의 결과를 읽어 보면, 하나님이 왜 베드로를 선택하셨는지 분명해 집니다. 이 사건이 교회에 가져올 변화를 감안할 때, 하나님은 가장 신뢰할 수 있고 권위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셨는데, 그 사람은 바울이 아니라 베드로였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 사건에 의해 시작된 변화와 씨름했던 예루살렘 총회(사도행전 15장)에서 기조 연설을 한 사람도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이야기 앞으로 가보겠습니다. 이곳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철저한 유대인 베드로와 철저한 로마인 고넬료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두 가지 환상이 있었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주신 환상을 통해 베드로를 집으로 초대하고 그의 메시지를 주의 깊게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신 환상에서는 고넬료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꺼림직한 일이었지만 그가 그렇게 했습니다. 부정한 동물을 먹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부정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 역시 유대인들에게 허용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깨끗한/부정한 용어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틀림없이 베드로는 가이사랴로 가는 동안 자신이 본 환상에 대해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로부터 그가 본 환상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유대 기독교 교회가 이방인 기독교인과 관계를 맺고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꾸게 될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이 누구도 편애하지 않으시고, 그분을 두려워하고 의를 행하는 모든 민족을 받아들이신다는 것이 너무나 참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베드로가 전에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일종의 주변적인 방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 개념은 항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언약적 상황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특별한 지위와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동시에 생각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 진리를 강력하고도 개인적인 방법으로, 또 교회와 사회를 영원히 변화시킬 방법으로 베드로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두려워하고 의를 행하는 모든 민족을 받아들이십니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경계를 가진 보편적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한 나라를 선호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조차 이 땅의 모든

나라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를 행해야 한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이 구절에 대해 한 주석가는 하나님은 국가, 인종, 성별, 계급, 종교와 관련하여 편애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이 마지막 말에 대해서는 베드로가 불만 이상의 것을 가졌을 지 모르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당연히 구약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에서 토라를 신뢰하고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야훼를 경외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의를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 이상을 의미했습니다. “의”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는 dikaiosune이며, 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바울이 나중에 발전시키게 될 칭의 교리의 중심에 있는 바로 개념입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할 때 그 교리를 염두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매우 특별한 조항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은총은 그들의 출신 국가, 민족 유산, 사회 계층, 성별 또는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분이신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 각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의 설교는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평화의 좋은 소식”에 관한 것입니다. 또 다시 보편적인 강조점이 있지만, 동일한 특수성이 있습니다–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특별한 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후에 행하신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간단하게 반복함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셨고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이야기가 신화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그가 한 모든 일의 증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세계적인 사명을 주실 때 사용하셨던 바로 그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그 몇 개월 동안 그리고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며칠 동안 그와 함께 있었던 이유입니다. 증인이 되어야 했던 그 이유 말입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그분을 나무에 달아 죽일” 때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사흘 만에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셔서 그를 보게 하셨을” 때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신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함께 먹고 마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가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도록 임명하신 분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온 세상을 위한 매우 특별한 메시지입니다. 교사이시고 기적을 행하는 분이시면서 (당시 그렇게 이곳 저곳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만) 또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 그리고 이제 모든 인간을 심판하실 그 분이 중심 되신 그 메시지 말입니다. 좋은 소식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재판관이십니다. 그러나 “모든 선지자가 그분에 대해 증언한 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그 이름을 통해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시고,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그리고 만유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그분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당연히 여성도 포함됩니다!) 받아들이십니다.

이 메시지가 분명해졌을 때 초대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 메시지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수종들은 성령의 선물이 “이방인들에게도” 부어졌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 단어들에 밑줄을 그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땅 끝까지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알았지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안에서 그들과 동등한 동반자가 될 것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몇몇 이방인들이 과거에 개종자가 되어 일종의 유대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방인들은 이제 그들의 유대인 예수님을 믿었고 그들이 오순절에 받았던 것과 같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방인들도 오순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교회에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이방인 신자들이 얼마나 유대인처럼 되어야 합니까?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기 위해 지켜야 할 언약적 규칙들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성령의 부으심으로 증명되고 즉각적인 세례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처럼 만약 하나님이 그들을 완전히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신 것이라면, 앞으로 우리는 이방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과거에 우리는 그들을 부정한 사람들, 피해야 할 사람들, 교제에서 배제해야 할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것이 초대 교회의 주된 논쟁거리였습니다. 예루살렘 총회가 이 문제를 해결했지만 이 주제는 수십 년 동안 많이 논란이 되었고, 심지어 베드로 자신도 이방인들과 교제했다고 비판 받았을 때 그들에게서 물러났습니다(갈라디아서 2:11-21).

이 주제가 지금 우리들에게까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에 대해 동의하지 않지만 (누군가 말했듯이 “우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시고 모든 민족을 받아들이시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이민 정책, 인종 차별, 성적 희롱, 계급 투쟁 같은 문제에 휘말리게 됩니다. 종종 우리는 복음의 보편적인 메시지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종이나 국가 또는 그 중 어느 것과 관계 없이 모든 인간을 구하는 특별하신 분에게 초점을 맞추기 보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특권 중 일부로부터 그들을 배제합니다.

이번 부활주일에 우리는 모든 사람이 생명을 가질 수 있도록 부활하신 그 한 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 분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세상에서 좋은 일입니다. 여러분은 그 이야기가 오늘날 교회에 미치는 함의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예수님이 마치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충만한 생명을 가질 수 있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교회에 좋은 일입니다. 고넬료는 환상을 보았고, 그로 인해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았고, 그로 인해 그의 좁은 개념의 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교회로 변화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에 필요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새로운 비전일 것입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아이디어

Flannery O’Connor의 단편 “계시”에 Turpin 부인이 본 환상이 나옵니다. 의사 대기실에 앉아 있는 동안 그녀는 다른 환자와 백인 쓰레기 및 검둥이(white trash and black n-word)라는 사회적 사다리 위에서 그녀 아래 있는지 이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헛소리에 열 받은 어린 소녀는 Turpin 부인에게 책을 집어 던지면서 그녀를 지옥에서 온 늙은 흑멧돼지라고 외칩니다. 집으로 돌아온 Turpin 부인은 자신의 머리와 상처 입은 자존심을 치료하면서 하나님이 속히 자신의 태도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보내신 것인지 고민합니다. 그녀는 돼지들에게 물을 뿌리면서 하나님과 논쟁합니다. “왜 납니까? 당신은 대체 뭔데요?”

그때 그녀는 “계시”, 곧 환상을 보았습니다. 태양 광선들이 다리 같은 것을 만들고, “천국을 향해 행진하는 거대한 영혼의 무리”가 그 위에 있습니다. 그 무리 중에 “백인 쓰레기 무리, 흰색 예복을 입은 검둥이 떼, 정신병자와 미치광이 대대”가 있습니다. 행렬 끝에서 그녀는 그녀처럼 “모든 것을 조금씩 갖추고 그것을 바르게 사용할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은 그 달갑지 않은 무리들 뒤에서 “위엄 있게, 항상 질서와 상식과 예의를 가진 것처럼 여겨지도록”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그 환상에서 Turpin 부인은 사회적 사다리가 뒤집혀 가장 작은 것이 가장 좋은 것보다 앞서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