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55-60 주석

부활절 절기의 다섯 번째 주일에 우리는 성령행전이라고도 불리는 사도행전을 여행하는 여정을 계속합니다. 성령행전이라는 제목은 초대 교회의 성장에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누가의 끊임없는 강조와 일치합니다. 사도는 없고 성령이 충만한 오늘 본문의 경우도 분명히 그러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서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첫 번째 설교를 통해 성장한 부활절 공동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 공동체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으며, 모든 세대의 교회를 위한 모델이었습니다. 하지만 완벽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박해는 우리가 사도행전 3장과 4장에서 읽을 수 있듯이 거의 즉시 시작되었고 내부 문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탐욕과 부정직은 그 공동체의 관대함을 손상시켰고(행 5장), 민족적 갈등은 한때 하나 되었던 몸을 분열시켰습니다(행 6장).

집사라는 직분은 그 민족적 다툼 중에 탄생했고,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그는 최초의 일곱 집사 또는 테이블 웨이터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도가 아니라 주님의 집에 있는 한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여(6:8)” 그는 “백성 중에 큰 기사와 표적을 행”(6:8)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반대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설교에 대해 논쟁하기 시작했을 때,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했습니다(6:9-10). 마지막으로 그가 거짓 고발에 맞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 앞으로 끌려갔을 때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보”였습니다(6:15).

그의 변증과 그에 따른 순교는 초대 교회의 큰 전환점 중 하나였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을 행함에 있어서 성령님은 교회에 계속해서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이 본문의 핵심적인 의미입니다. 적대적인 반대에 직면하여 사람들이 용감하게 성령의 능력을 받아 증언하도록 격려하는 데 이 본문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본문의 적법한 적용이 되겠지만, 사실 이 본문의 요점은 “처음”에 있습니다. 사도가 아닌 사람이 전파한 최초의 메시지; 첫 번째 순교; 처음으로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쫓겨났습니다. 처음으로 비유대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처음으로 폭력적으로 복음을 반대하던 사람이 가장 열렬한 설교자로 변모한 것과 같은 다른 첫 번째 일들이 뒤따랐습니다.

스데반은 성전과 율법에 반하는 말, 특히 예수께서 성전을 헐고 모세로부터 물려받은 관습을 바꿀 것이라고 주장한 혐의로 고발당했습니다. “이 혐의가 사실입니까?” 대제사장이 물었습니다. 스데반의 대답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성전에 초점을 맞춘 구속사에 대한 훌륭하고 예리한 리허설입니다. 나는 그가 단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날카롭다고 말합니다. 그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거의 우상화한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결국 날 선 비판으로 귀결됩니다. 분명히 스데반은 성전이나 모세를 비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이 지도자들이 성전에 행한 일과 모세에게 행하지 않은 일에 반대하여 말했습니다.

2-47절을 함께 읽어 보면 스데반이 신실한 유대인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만일 그가 47절에서 멈췄다면 그는 풀려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전과 항상 성령을 거역하고

선지자들을 죽이고 이제 예언된 ‘의인’을 배반하고 살해한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로 인해 산헤드린 공회는 순식간에 경청하는 청중에서 성난 군중으로 변모했습니다.

스데반이 거기서 멈췄다면 그저 구타를 당하고 파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으로 이동합니다. 그 결과 교회는 그날 위대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의도하신 것입니다.

적어도 그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 부분에서 들리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았고…” 나머지는 역사, 신성한 역사,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역사입니다. 스데반의 설교에 영감을 주셨던 성령께서 이제 그를 감동시켜 하늘을 우러러보게 하셨습니다. 그 동일한 영이 스데반의 입을 열어 그가 하늘에서 본 것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에게만 간직하고 다른 날 설교하기 위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삶과 죽음 모두에서 제자들의 증거하는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자신이 본 것을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야 그리고 (거의) 모세처럼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다른 신약 본문에서처럼), 마치 행동할 준비가 된 것처럼, 어쩌면 돌아올 수도 있는 것처럼 서 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이것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첫 등장입니다. 스데반이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그 노골적인 신성모독(예수는 지위와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산헤드린 공회는 이를 가는 선생에서 고함을 지르는 살인자로 변했습니다. 스데반에게 돌진하여 그를 도시 밖으로 끌어내어(항상 규칙을 지키는 자들) 그들은 그를 돌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동안, 이전에 언급되지 않은 한 청년이 사도행전의 이야기에 소개됩니다.곧 교회의 적극적인 박해자가 될 사울은 그들의 옷을 수동적으로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스데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했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본 받아 죽었습니다. 여기서 그 설교자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우리의 영을 예수님께 맡기고 마지막 숨을 거두었으며, 우리의 삶을 곤경에 빠뜨리는 사람들도 용서하면서, 삶과 죽음에 있어서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청자들에게 정당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스데반은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본 받고 있으며 그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 중 두 가지를 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끝까지 살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심각한 죽음이라도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심지어 폭력적인 살인도 그저 잠 자는 것보다 더 심각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누가의 영리한 표현 아니겠습니까?

부끄러운 일입니다! 얼마나 비극입니까! 교회는 위대한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네, 60절에서 바로 읽기를 중단한다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계속 읽으면 이 비극은 승리로 바뀝니다. 위대한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더 위대해질 사람의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던 사울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다메섹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좇아 갔던 사울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가지고 갔던 바울입니다.

그 머나먼 임무는 스데반의 죽음의 즉각적인 결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네, 모두

매우 슬펐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위하여 깊이 애곡”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아닌) 흩어진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말씀을 전파”했으며, 여기에는 에티오피아 내시를 예수께 인도한 빌립이라는 또 다른 집사가 포함됩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밖의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터툴리안이 오래 전에 말했듯이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세상에 생명을 주셨던 것처럼 스데반의 죽음은 교회에 새 생명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스데반이 살다가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면, 그가 누구인지를 감안할 때 그가 무엇을 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이런 식으로 죽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세상을 위한 자신의 위대한 계획 가운데 이 비극을 승리로 바꾸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큰 손실이 하나님의 영광에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본문이 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 비(非)사도 전도자, 첫 번째 순교자, 교회가 처음으로 예루살렘의 경계를 떠난 때, 이방인에게 첫 번째 증인이 된 사람, 사울의 회심의 첫 단계, 이방인을 향한 선교사 – 이 모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을 세상을 변화시키는, 부활하시고 통치하시고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으로 변화시키시는 성령님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하나님께서 그의 죽음을 놀라운 방법으로 사용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의 죽음을 사람들이 깊이 슬퍼한 것이 기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씨름하는 방식을 말해줍니다. 저명한 기독교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등산 사고로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의 책,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Lament for a Son)에서 들려주듯이, 그 죽음은 월터스토프를 황폐화시켰습니다.

그의 회고록에서 월터스토프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으로 그러한 손실을 막으려는 모든 방법을 고려합니다. “하나님이 하셨고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계획의 일부입니다.” “어떤 이들은 비극이 영혼을 만드는 신의 전략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비극이 우리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를 벌하시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욥의 친구들과 같은 말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과 나만큼 손실로 인해 고통을 받으셨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린 아이의 때 아닌 죽음은 하나님이 인간 일반을 위해 가져오고 있는 더 큰 선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월터스토프는 신정론에 대한 고전적인 시도 중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단순히 슬퍼해야 할 신비를 우리에게 남겨두신 하나님의 방식을 더 선호합니다. 오래된 한 노래는 하나님이 신비한 방식으로 역사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시편 기자들과 함께 슬퍼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 뿐입니다.

나는 이 접근을 좋아하지만,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우리는 슬퍼하는 중에도 하나님께서 비극(특히 스데반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사용하셔서 그 당시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위대한 일을 성취하셨다는 사실 또한 신뢰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