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7:(1a, 4-11, 19-23), 32-49 주석

이스라엘의 군주제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고, 그 역사를 통해 우리 삶에서 인간 리더십과 신적 주권 사이의 관계를 돌아볼 때, 우리는 이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안에서 다윗이 권력을 잡게 되는 두 번째 장입니다. 사무엘상 16장에서 만난 소년 목동이 어떻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이 되었을까요? 여기에 그 성공담의 한 가지 핵심 요소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시 설교해도 되는 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물매를 든 한 소년이 난공불락의 갑옷과 무적의 무기를 가진 무시무시한 거인을 한 방에 물리쳤다는 내용은 너무나 유명한 서구 문화의 한 부분이며, 그래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이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신경이 쓰일까요? 다른 수많은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처음 눈에 띄는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에는 C. S. Lewis의 ‘Til We Have Faces’, 참고. 한국어 번역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다른 한편에는 Gillian Flynn의 ‘Gone Girl’, 참고. 한국어 번역 ‘나를 찾아줘’가 생각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우리 시대의 역사에 엄청난 함축적 의미를 가집니다.

순수하게 문학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극복할 수 없는 역경에 맞선 용기라는 놀라운 주제가, 물론 그렇게 단순하게 볼 문제는 아니지만, 이이야기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베들레헴(문자적으로 ‘빵집’)에서 전쟁터에 나가 있던 형제들을 위해 빵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과 골리앗과 다윗이 상대방의 시체를 새와 짐승의 먹이로 주겠다고 협박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다윗의 마음 약한 형제들이 악한 마음을 가졌다고 다윗을 비난하지만, 사실, 그때, 하나님은 그의 중심을 보셨고(16:7),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했다는 것이고(13:14), 핵심은 사자와 곰의 발에서 구원 받았던 다윗이 하나님이 골리앗의 손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주실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37절).

표면적으로 보면, 압도적인 괴롭힘에 맞서는 젊은이의 용기에 대한 이야기 맞습니다. 다윗은 단순한 소년입니다. 그가 전사였다는 이전 언급(16:18)은 이곳에 없습니다. 그것이 요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때로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목동에 불과하고, 특히 전쟁터에 있는형제들에게 보급품을 운반하는 일을 합니다. 최전선에 도착해서 골리앗의 말을 들을 때, 그는 이스라엘 군대 전체가 두려워하던 일에 과감하게 자원하는 건방지고 거만한 사람입니다. 그의 오만한 용감함에도 불구하고, 골리앗에게 맞설 기회는 없습니다.

저자는 다윗이 직면한 도전의 규모를 드러내기 위해 애를 씁니다. 골리앗은 말 그대로 거인입니다. 키가 9피트 9인치(머리 끝이 농구 골대 테두리보다 3인치 정도 아래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입니다. 방어에 있어서는 난공불락이고 공격에 있어서는 무적인 완전 무장한 노련한 전사입니다. 그의 갑옷은 다윗보다 무겁고, 창끝은 포탄보다 무겁습니다. 골리앗은 군대 전체의 운명을 일대일 전투로 결정할 정도로 (다윗처럼 애송이에 불과한 이스라엘에 대해) 승리를 확신합니다.

다윗에게 이길 기회가 없어 보입니다. 형제들도 그 사실을 알고, 군대도 그 사실을 알고, 사울도 그 사실을 아는데, 다윗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패배하면 백성들이 살육당하고 노예로 전락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골리앗에게 맞서 싸우기로 합니다. 이싸움이 기회와 상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문제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도전적인 포효를 들을 때 우리는 힌트를 듣습니다. 다윗은 이 거인으로부터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는 동족의 수치심을 느끼지만, 그 보다 자신의 백성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라는 사실 때문에 분노를 느낍니다. 이 싸움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간의 대결이 아니라, 블레셋의 다곤처럼 죽어서 무력한 존재하지 않는 신과 다른 역사 속에서 언약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행동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대결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자신의 삶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사자나 곰이 자신의 양떼를 공격하면 다윗은 그 털을 잡아 끌어 그들을 내쳤습니다. 자신을 공격할 때는 맨손이나 목자의 막대기나 곧 유명해질 물매로 그들을 죽였습니다. 다윗은 그런 엄청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이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이 말은 다윗이 사울에게 개인적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 원했기 때문에 골리앗에게 도전할 때는 이 말을 확대합니다. 골리앗이 블레셋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자 다윗이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신앙고백으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됩니다. 총 15개의 능동태 동사를 쏟아내며, 다윗은 골리앗을 공격합니다. 물매 돌 하나와 거인의 칼 한 방으로 전투는 끝납니다. 그 용감한 소년은 무적의 거인을 간단하게 물리칩니다. 모든 것이 언약을 지키시는 살아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입니다. 이 이야기는 수세기 동안, 초등학교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그들을 괴롭히는 아이들의 경우부터, 흑인 노예와 농장 주인의 경우에 이르기까지, 억압받는 사람이 억압하는 사람과 싸우는 것을 격려하는 데 사용되어 왔습니다. 물론, 정당한 일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다윗이 여기서 용감하고 대담한 일을 했습니다. 그는 액션 영웅이며 우리에게는 그런 영웅이 필요합니다. 그는 이 이야기에서 보여준 행동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골리앗과 같은 존재들과 싸울 때 성도들을 도우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 설교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다윗의 용기를 강조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을 강조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다윗은 분명히 후자를 택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윗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를 내가 너희를 물리칠 것이며, “그로 인해 온 세상이 이스라엘에 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 같은 생명이 없는 신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고 한 말입니다. 우리는 도전적인 악에 맞서 행동하는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을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성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 진리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하고 중요한 실례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 시대의 골리앗과 맞서 싸우는데 어떻게 사용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윗과 골리앗을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억압받는 어떤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런 사람들의 모임입니까? 골리앗은 한 사람의 개인입니까? 아니면, 조직이나, 시스템이나, 외국 또는 자국의 정부입니까? The New Interpreters Bible은 이 이야기를 이렇게 적용합니다. “이 이야기는 압도적이고 사악한 힘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아가 미래를 성취할 방법이 있다고 믿는 모든 사람의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특별히 그 유일한 희망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약자들과 억압받는 사람들과 주변인들과 힘 없는 사람들에 의해 말해지고 또 말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인종 간의 평등을 위한 투쟁이나,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나, 공화당 주와 민주당 주 사이의 의견 불일치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이 본문 안에 사회 정의에 대한 함의가 담겨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 본문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베소서 6:12)에 대한 보다 깊은 영적 투쟁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저는 이러한 복잡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아는 척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질문들이 너무나 복잡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사울과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말에서 알 수 있는 이 이야기의 주된 신학적 요점을 어떻게 적용할 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라고 촉구하고 싶을 뿐입니다. Brueggemann이 말한 것처럼 다윗은 “이방 민족들을 따라하는 것에서 이스라엘을 벗어나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어리석은 반항으로부터 이방 민족들을 벗어나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용기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못과 창에 찔리신 우리를 구원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위한 신성한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한 나라나 주, 또는 교회의 주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은 무엇입니까? 어떤 일에 대한 헌신입니까? 교육이나 경험의 수준입니까? 개인적인 매력이나 도덕적인 정직성입니까? 정신력이나 심리적 안정감입니까? 캠페인의 공약입니까? 조직에 대한 확인 된 충성심입니까? 이 모든 것들이 이 나라 사람들이 지난 선거에서 던졌던 질문들입니다. 흥미롭게도, 동시에 슬프게도, 극소수의 사람들만 다윗을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만든 한 가지 특별함,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성경의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한 깊은 신뢰를 찾고 있습니다. 주어진 기존의 기준들 안에서 우리가 항상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