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편집자의 우발적인 사건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가 동전을 던져서 시편 중에 어떤 시를 시편1편으로 정할지 결정한 것도 아닙니다. 시편 저자가 신중하게 편집한 것이며 의도적으로 구성된 시 모음집입니다. 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5권의 책으로 나뉜 시편의 각 책이 끝날 때마다 마지막 구절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하라, 아멘.”이라는 구절의 변형으로 마무리됩니다(참조. 시편40:13, 72:19, 89:52, 105:48). 시편 전체는 점진적으로 고조되며, 모든 호흡이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시편 150편의 열정적인 선포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편 1 편과 2편에서 시작합니다. 이 둘을 함께 읽어야 하지만 설교를 위해 시편 1편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 두 시편은 시 전체의 분위기를 설정하는 시들이며, 시 전체를 경주하게 하는 시적 페이스카와 같고, 앞으로 펼쳐질 시적 풍경의 지도를 해독하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시편 1편의 경우, 여기서 그려지는 것은 온전하고 통합된 세계관과 삶의 관점입니다. 앞으로 등장하는 모든 시들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시편 1편이 제공하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여기에 나오는 구도는 아주 단순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입니다. 영적 범주에서 그 중간에 속하는 것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현실을 상당히 흑백 논리로 바라보게 된다해도 이 시를 잘못 읽는 것은 아닙니다. 이 패턴이 나머지 149편 전체에서 계속 발견된다해도 그것 역시 잘못된 해석이 아닙니다.
시적 이미지에 있어서 시편1편은 직관적입니다: 의인은 안정성과 신실함으로 그려집니다. 그들은 경건한 평온 속에서 거의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들은 악인과 함께 걷지도, 서지도, 앉지도 않습니다. 물가에 심은 나무의 모든 좋은 것을 나타냅니다. 충분한 안정성. 충분한 수분. 그들은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안정감 있고, 강하며, 문자 그대로 매우 견고합니다.
그러면 악인들은요?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쇠퇴하고, 잘못된 길과 자리에 서 있으며, 그 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들은 부산스럽고,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뿌리가 깊지 못해 결국 바람에 날아가 버립니다. 종국에는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실체가 없습니다. 그들 안에는 진정한 ‘본질’이 없습니다.
하지만 의인들은 끊임없이 흐르는 시냇가에 심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길과 율법, 그리고 하나님의 실재 그 자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영양분을 흡수하며 자라나고, 그로인해 성장과 단단함, 영원한 굳건함을 얻습니다. 시편 1편은 우리에게 선택을 제시합니다. 당신은 영원히 굳건하게 세워질 수 있거나, 마치 머리가 잘린 닭처럼 허둥지둥 뛰어다니며, 끊임없이 무언가 더 나은 것을 향해 움직이는 듯 보이고, 마치 실체 있는 무언가를 세우는 듯 보이지만… 결국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요란한 소리와 분노로 가득차 있지만 결국 아무 의미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 드러난 이 그림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과 이 그림을 일치시키는 일은 상당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회중의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에 직면했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 많은 사람들은 한 가지로 단순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단순히 “악인”이라 말할 수 없는 비기독교인들도 많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큰 친절과 사랑을 보여줍니다. 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깊이 뿌리내린 안정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꽤 심하게 못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종종 좋은 사람들인 반면, 신자들은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 결국에는 악인들이 겨와 같이 날라갈 것이지만 지금은…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꽤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 결국에는 의인들이 반석처럼 견고한 존재로 드러날 것이지만 지금은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크게 고통을 겪고 있고, 그들이 바라는 것처럼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 말이나온 김에, 위의 첫 번째 요점과 비슷하게, 뉘앙스와 모호함, 수많은 도덕적 회색 지대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이렇게 흑백 논리적 세계관을 택하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요? 이것은 너무 단순화되고 너무 축소된 접근은 아닐까요?
시편 1편을 마주한 상황에서 이러한 반론들에 대해 단호하게 반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의 진리를 선포하고자 한다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체 히브리 시편 150편의 분위기와 흐름을 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설교자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아주 쉬운 방식처럼 보이지만 멀리 내다보는 시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날이 도래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는 때에 드러나게 될 현실의 본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너무도 쉽게 보고 관찰할 수 있는 것들이 결국에는 잘못된 것, 불완전한 관점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은 가장 견고하게 보이는 것조차 결국은 속이 텅 빈 것으로 드러날 수 있으며,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온유해 보였던 이들이 결국에는 땅을 유업으로 받을 만큼 견고한 존재임이 증명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좀 더 즉각적인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인데, 우리는 시편 1편을 C. S. 루이스가 말한 사물의 깊은 구조, 곧 우주의 깊은 마법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멈춤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모습을 보게 될 그 날에는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궁극적인 날이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의 얄팍한 통찰이라 불리는 것들의 피상성을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앞서나가려는 열망으로 사용하고 있는 방식들은 오히려 자기 파괴적입니다. 자신만의 인생을 만들겠다는 노력은 오히려 충만하고 잘사는 삶이 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결혼이 파탄나고, 자녀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며, 어떤 이들은 육체적 건강까지도 무너뜨리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떤 황금 고리를 쥐기 위한 미친 듯한 경쟁과 절박한 질주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이 말하는 “아름다운 사람들” 즉, 명성과 부와 성공을 이룬 사람들에 비해 외형적으로는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더 깊은 평안과 만족을 누리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훨씬 깊은 쉼과 안정감을 삶 가운데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이 제시하는 단순한 ‘의인과 악인’의 구도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복잡한 회색 지대를 무시하거나 섣부른 판단과 결론에 이르도록 만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의인’의 부류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도리어 도덕적 나태함이나 신자들이 종종 드러내는 불쾌한 태도에 대한 핑계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시편 1편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진리가 있는데, 일상에서 눈으로 보는 현실 너머에 더 깊고 참된 현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뉴욕 타임즈가 “출판할 가치가 있는 모든 뉴스”를 다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가장 크고 중요한 진리를 여전히 놓칠 수 있습니다. CNN이 “세상을 전해준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세상이 본래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물이라는 진짜 본질은 놓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존재의 중심에서 밝게 빛나고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이 세상의 슬프고 깨어진 현실과 날마다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충격적인 사건들을 생각해보면, 시편 1편이 우리로 더 크고도 넓은 세상을 품도록 상기시켜주는 것이 과연 나쁜 일일까요?
예화 아이디어
칼빈신학교의 설교 사역 센터를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이나 우리의 웹사이트를 주의깊게 살펴본 이들은 시편1편의 시냇가에 심은 나무 이미지가 우리의 로고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또한 미시간 그랜드 래피즈에 있는 신학교의 학생 센터 중심에 위치한 유리창에 있으며, 주디 아폴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이미지를 수년 전에 설교 센터의 상징으로 선택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설교에 대해 본질적으로 믿고 바라는 바를 잘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평생 양육하고 먹이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이 보여주는 안정감, 영원한 안식, 현실의 바른 편에 있다는 확고부동한 확신, 그리고 시편 1편의 흐름을 이어가는 나머지 149편의 시편들에서 더욱 강화되는 모든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율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묵상에 달려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는 하나님 말씀의 절정이자 우리에게 최종적인 구원을 가져다주는 은혜의 복음에 대한 평생토록 지속되는 묵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설교하는 것입니다. 시편1편은 이 귀한 진리를 다시금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이번 주 대체 시편 본문: 시편 139:1-6, 13-18.
시편 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