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6:1-4, 12-19  주석

전 세계적인 공포와 걱정, 그리고 슬픔의 시기에, 시편 116편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동시에 열망을 품게 합니다. 이 시편은 우리가 방향을 잃거나 심지어 죽음의 자리에 있을 때,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언한다는 점에서 영감을 줍니다. 또한, 우리도 머지않아 시편 기자처럼, 단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넘어, 우리를 위기에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자리에 동참하게 되기를 소망하게 한다는 점에서 열망을 품게 합니다. 이 글을 준비하며 이 시편을 읽었을 때, 저는 “오 주님,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반복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렉셔너리가 특별한 이유 없이 시편 116편 중간 부분을 생략했지만, 이 시편은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이 시편 전체를 다루려고 합니다. 물론, 렉셔너리가 정한 대로 첫 네 절과 마지막 여덟 절만 선택하더라도 설교 아이디어를 얻는 데는 충분할 것입니다.

시편 116편은 매우 솔직한 시입니다. 한편으로는 죽음에 이를 뻔한 상황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15절에 나오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그의 겅건한 자들의 죽음을 귀중하게 보신다고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모든 신실한 이에게 주어지는 ‘죽음 면제권’ 같은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신실한 성도라 할지라도, 어느 시점에는 이 땅에서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 오기 마련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죽은 친구의 무덤으로 가시는 길에 이 말씀을 하셨고, 그 친구는 그날 예수님 덕분에 살아났지만, 결국 어느 날 다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나사로가 지금도 중동 땅을 돌아다니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예수님을 “부활이요 생명”으로 믿었던 마르다 역시 결국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았습니다. 모든 이가 그렇습니다.

이 시편이 렉셔너리 A년도상 부활절 두 주 뒤에 배치된 것을 보면, 예수님이 이 시편을 친히 낭송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분은 죽으셨고 (그 죽음은 아버지께 소중했습니다), 또한 죽음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경우, 다시는 죽지 않게 돌아오신 것이지요). 또는 우리 자신이 부활에 대한 감사의 고백으로 이 시편을 노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시편 116편의 역설은 우리 상황에 잘 들어맞습니다. 우리는 최종적인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았음을 믿는 동시에, 언젠가는 반드시 육신의 죽음을 먼저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가 이러한 긴장 관계가 오늘날 우리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적용될 것을 상상이나 했을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긴장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시편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감사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자문합니다. “이 모든 구원에 대해 내가 하나님께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그는 감사제를 드리고 구원의 잔을 높이 들며, 서원을 이행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시편을 지음으로써 이미 실천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겠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어느 것도 진정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비유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피자 한 조각을 사 먹으라고 5달러를 건네주고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면, “고마워, 친구!”라는 말로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여러분에게 신장을 기증하여 당신이 50세에 죽지 않고 30년을 더 살게 해 주었다면, “고마워, 친구!”라는 말은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감사의 표현일 것입니다. 실제로는, 당신은 그 기증자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싶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무엇을 하든 또는 어떤 말을 하든, 또는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하든, 그 감사함을 온전히 다 표현할 길은 결코 찾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선물은 서로 주고받는 계산 자체를 무색하게 만듭니다. 이는 『빅뱅 이론』에서 쉘든 쿠퍼가 친구 페니와 선물을 교환하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쉘든은 누구에게도 빚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페니가 줄 선물의 가격을 가늠한 뒤 그보다 약간 더 비싼 것을 줄 수 있도록 가격대별로 여섯 개 이상의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머지 선물들은 환불할 계획이었죠). 하지만 페니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허를 찌르는 한 수를 던집니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그녀가 일하는 식당에서 우연히 쉘던의 영웅이자 『스타 트렉』의 스포크 역을 맡았던 배우 레너드 니모이를 만나 냅킨에 그의 친필 사인을 받은 후 쉘던에게 선물로 건넨 것입니다. 쉘던은 충격에 빠집니다. 그 선물에는 값을 매길 수 없으니까요. 그에게는 값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진 선물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준비한 여섯 개의 선물을 모두 페니에게 주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평소 사회성이 부족하고 관계가 서툴던 이 남자는 평소에 절대 하지 않던 행동을 합니다. 바로 페니를 진심으로 안아준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조차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시편 기자처럼 넘치는 감사를 느끼는 것도 당연하고, 또한 그 감사만으로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 역시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바로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사를 충분한 것으로 여겨주신다는 증거가 성경 곳곳에 가득합니다. 이것을 선물 위에 더해진 선물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감사를 표현하려는 우리의 미약한 노력에도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은혜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빌리 콜린스의 ‘목걸이 줄(Lanyard)’이라는 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감사를 기꺼이 받아 주신다는 이 사실을 잘 표현해줍니다. (콜린스가 이 시를 직접 낭독하는 것을 들으시려면 다음에 나오는 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Here)

며칠 전, 나는 천천히 튕겨 다니면서

이 방의 파란 벽에 부딪히고 있었어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타자기에서 피아노로,

책장에서 바닥에 놓인 봉투로,

그러다 사전의 L 부분에 이르렀고

내 눈은 lanyard라는 단어에 멈추었지.

프랑스 소설가가 한 입 베어 문 쿠키조차

나를 그토록 갑자기 과거로 데려갈 수는 없었을 거야 –

Adirondack 깊은 호숫가 캠프에서

작업대에 앉아

가늘고 긴 플라스틱 조각들을 엮어

어머니께 드릴 선물로, 목걸이 줄을 만드는 법을 배우던 그 시절로.

나는 목걸이 줄을 사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고

그걸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도 본 적이 없었어,

그럼에도 그 사실이 내가 그 줄을 계속해서 엮는 걸 막지는 못했지

실 한 가닥 한 가닥을 엮고 또 엮고

마침내 네모난

빨간색과 흰색의 목걸이 줄을 어머니께 만들어 드렸어.

어머니는 나에게 생명과 젖을 주셨고,

나는 어머니께 목걸이 줄을 드렸어.

어머니는 수많은 병상에서 나를 돌보셨고,

내 입술에 수저로 약을 가져다 주셨고,

차가운 물수건을 내 이마에 얹어 주셨고,

바람이 잘 통하는 햇살 가득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셔서

걷는 법과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어.

그리고 나는 어머니께 목걸이 줄을 드렸어.

어머니는 말씀하셨어. 여기 수천 끼의 식사가 있고,

옷과 좋은 교육이 있단다.

나는 대답했어. 여기, 어머니의 목걸이 줄이 있어요,

상담 선생님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아 만든 것이에요.

여기에 숨 쉬는 몸과 뛰는 심장이 있고,

튼튼한 다리와 뼈와 이가 있으며,

세상을 읽어 내는 두 개의 맑은 눈이 있단다, 어머니가 속삭였어,

그리고 여기, 나는 말했어, 내가 캠프에서 만든 목걸이가 있다고,

그리고 지금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은 건,

더 작은 선물이 있다는 거야 –

결코 어머니의 은혜는 되갚을 수 없다는 낡은 진실이 아니라

어머니가 내 손에서 두 가지 색깔의 목걸이 줄을 받아 들었을 때,

내가 어린아이로서 확신했던 것에 대한 씁슬한 고백.

왜냐하면 내가 지루함을 달래려고 엮은

이 쓸모 없고 가치 없는 물건이

어머니와 나 사이를 동등하게 엮어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