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8:1-2, 19-29 주석

언뜻 보기에는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시편118편의 일부, 특히 22-23절은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약 본문입니다. 시편23편이 아닙니다. 시편100편도 아닙니다.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이나 다윗과 골리앗 같이 잘 알려진 이야기도 아닙니다. 아니죠. 아주 오래된 시편118편입니다.

이것은 항상 저에게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심지어 매우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시편118편에 있는 내용을 찾아보지 않고는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시편과 지혜 문학 첫 강의에서 종종 학생들에게 차례로 가장 좋아하는 시편 또는 오랫동안 자신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시편이 있는지를 물어봅니다. 어느 누구도 시편118편을 언급한 적이 없었습니다. 시편150편 중에서 이 시편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구절은 그 자체로 버린 구절처럼 보입니다. 이런 건축 이미지가 시편118편에 어떻게 등장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태, 마가, 누가(두 번),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모두 이 작은 구절과 모퉁이돌 이미지가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을 포착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적절한 무언가가 있는 듯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도 볼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사역을 한 후에 세례 요한도 의심이 품기 시작했고, 제자 중 한 명을 보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진정 그 분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대해야 합니까?” 더 나은 사람, 외형적으로 더 인상적인 사람 말이죠.

예수님도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부모가 너무 가난해서 염소의 먹이통 보다 더 좋은 것을 살 수 없어서 그것을 아기 침대로 사용했습니다. 아버지의 가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일해야 했던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좋아했던 이상한 순회 선생이였습니다. 그가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섰을 때, 빌라도마저도 이 모든 소란이 무슨 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걱정되십니까” 빌라도는 유대 당국자들에게 예수를 데리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닐 플랭팅어가 말했듯이, 구세주가 아닌 거리에서 일어나 사고처럼 보이는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거부당한 돌에 대해 이야기하십시오…. 예수님은 참으로 넘겨지고, 버림받고, 거절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로 그 분이십니다. 시인은 “주님이 이것을 행하셨는데, 이것이 우리의 눈에 경이롭습니다”고 열정적으로 썼습니다. 시편118편의 저자가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경 저자들처럼, 그는 성령의 영감으로 그가 아는 것 이상의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확실히 이 시인은 몇 세기 후 복음서 저자와 사도들이 이 구절을 하나님의 메시야에게 적용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버린 돌에 관한 구절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버림받은 나사렛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을 성취하셨는지에 대한 완벽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구절의 상대적 모호함은 나중에 갑자기 나타나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구원자의 상대적 모호함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것은 좋은 소식인데, 시편118편의 큰 맥락에서 보면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내신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일, 참으로 경이로운 일을 행하시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종려주일 설교를 위해 이 시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을 설교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종려주일/수난주일에 연계해서 설교한다면, 이것은 2년 연속 삶과 예배를 위축시키고 있는 팬데믹같은 힘든 시기에 잘 어울립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끝이 없어 보이는 지난 한 해 동안 낙담과 버림받은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낙담했습니다.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보고 싶고 안아보고 싶은 사람들로부터 멀리 던져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을까란 질문을 우리는 계속해서 던지고 있습니다.

시편118편의 메시지가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어려운 질문에 대한 깔끔하고 정돈된 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림받은 돌을 주목하고, 영광과 존귀로 회복시켜 우주의 구원을 가져오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 구원자, 이 모퉁이돌이신 그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계셔서 지금 고립된 우리를 보는데 능숙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생명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좋으신 분이십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이 최후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즐거운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동료 신자들과 함께 전혀 찬양을 부르지 못한채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버림받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웅장한 구원의 모퉁이돌이 되신 분과 함께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눈에 경이로운 일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나는 프레드릭 뷰크너의 유쾌한 책, “독특한 보물: 성경 인물 사전”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그의 인물 묘사를 늘 좋아했습니다. 뷰크너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만약 슐레미엘이 늘 자기 넥타이에 수프를 흘리는 사람이며 슐레모즐은 늘 다른 이들로 인해 그의 넥타이에 수프를 묻히는 사람이라면, 아브라함은 슐레모즐에 해당한다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기도 하며, 다른 사람이 그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하기도 하며, 하나님이 그에게 명령하신 긴 여정(방랑하는 유목민이 아니라 휴식과 은퇴가 당연한 일상이었던 그의 삶에서 새로운 여정을 떠나야 했던 바로 그 순간)을 헤쳐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하늘에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이 많은 후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의 인물 묘사 마지막 부분에서 뷰크너는 가족 상봉 피크닉에 참석한 매우 늙은 아브라함을 상상합니다. “그들은 확실히 아직 큰 나라가 되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이 벨벳 모자를 쓴채 왕좌에 앉아 증손자 여럿을 자신의 무릎에 앉힌 모습을 보면 당신은 그것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의 두꺼운 안경을 통해서도 당신은 그의 눈에 담긴 믿음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유대교식 식사, 위대한 업적, 아인슈타인과 키싱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사랑하셨다는 것과 최우선적으로 그를 선택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들이 언젠가 나의 증손자, 즉 세상의 구원자에 대해 말할 것을 누가 알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위대한 일을 하도록 부름받은 이 평범한 인물의 초상화의 단순함이 시편 118편과 잘 어울립니다. 버림받은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