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2편은 시편120편부터 134편까지 이어지는 15편의 시편 중 하나입니다. 각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란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제목의 의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던 순례의 노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열 다섯 편의 시편들에 “예루살렘”, “시온” 그리고 “야웨의 집” 이란 용어들이 매우 높은 빈도로, 그리고 밀도 있게 등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시편122편에 지리적 구체성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시편은 실제로 존재하는 도시에 대한 노래입니다. 즉각적인 배경은 순례자들의 도착 장면으로 보이는데, 2절,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행자들은 이제 막 도착하여 도시의 첫 모습을 보며 감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 곳의 건축물에 감탄하며, 성벽과 요새, 그리고 도시의 밀집된 구조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특히 예루살렘의 재판소가 하나님 백성을 위한 지혜로운 판결이 내려지는 장소로 언급됩니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시편은 예루살렘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예루살렘을 온전히 지켜주시고, 그 성벽을 견고하게 하시고, 성문을 안전하게 하셔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안전한 피난처에 거한다는 외적인 안전감 속에서 내적인 평안 또한 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이것은 분명히 시편137편에서 언급된 “시온의 노래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롱하듯 포로지에서 부르게 했던 바로 그 노래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이방 땅에서 그런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루살렘의 견고한 성곽을 찬양하는 시편을 어떻게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어떤 성벽도 바벨론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이 잿더미가 되어 승냥이들의 거처가 된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 성벽을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루살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어떻게 예루살렘을 기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이 도시와 직접 관련이 없는 우리가 어떻게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시편 122편이 노래한 그 예루살렘은커녕 현재의 예루살렘조차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시편에 언급된 도시는 오래 전에 사라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도 같은 도시가 아니었고, 이미 무너진 솔로몬 성전을 대신해 헤롯이 새롭게 지은 성전이 있던 재건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그 도시조차도 사라지고, 이제는 현대의 예루살렘으로 대체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단지 역사적인 호기심이나 이스라엘이 한 때 수도로 여겼던 것을 추억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시편122편에서 무엇을 얻고 배울 수 있겠습니까? 아마 “거의 아무 것도 없다”라고 답할 수도 있습니다. 즉, 성경의 어떤 부분은 오직 역사에 관한 것이고 오늘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전통의 호머의 작품을 감상하듯이 이 시편의 시적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학적 연구와 역사적 교훈을 넘어서는 의미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시편23편 같은 다른 본문으로 넘어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역사적 특수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저는 거기에 시대를 초월해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이 다소 억지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된 성경의 통일성을 믿는다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들을 찾아내고 그 사이에 연결점을 만드는 것은 조금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왜 그렇게 찬양받았는지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고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존속이 시편122편의 배경에 어느 정도 기여하긴 했지만, 정치는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향수나 여행자가 새로운 장소를 방문할 때 느끼는 단순한 경이로움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이 시편의 풍성한 표현을 떠뜨리게 한 근원은 바로 예루살렘에 임재하신 야웨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당시에는 땅 위에서의 특별한 거처를 시온산, 곧 성전이라 계시하셨습니다. 구속사 전체의 흐름 속에서 그 시기는 이스라엘이 언약의 중심에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 언약의 약속은 결국 모든 민족에게 확장되었고, 땅의 모든 나라들의 미래의 복은 아브라함의 자손의 신실함에 달려 있었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은 그곳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통해 우주적인 일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언약은 그곳에서 만개했으며, 그것이 예고했던 전세계적인 구원이 충만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이 존귀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순례자들이 그곳을 향해 갈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지를 방문하는 이유는 과거를 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을 따라 걸으며 과거형으로 그분을 떠올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는 것은 경건한 향수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편122편이 기록될 당시에는 예루살렘이 과거에 의미했던 것뿐만 아니라 미래에 약속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활동하셨고, 그의 영이 임재해 있었으며, 그는 그의 백성 앞에서 경이로운 일을 행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의 강림이 모든 자녀에게 부어지고, 우리가 이제 성령의 전이 되었다는 계시와 함께, 기독교 전통은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한 위치 또는 장소에 대한 개념을 희석시켜 왔습니다. 우리는 경건을 위한 단 하나의 장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된 일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신약 성경이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결과라 하더라도, 우리가 잃어서는 안되는 무언가-시편122편이 여전히 우리에게 상기시켜 줄 수 있는 진리-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아마 그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것을 ‘문제’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그리고 지상에 있는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 안에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하지만 거룩한 공간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무뎌지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모든 것이 거룩하다는 개념에서 특별하게 거룩한 것은 없다는 개념으로 치우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신앙에 하나의 중심이 되는 명확히 구별된 성소가 있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그곳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부드럽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곳에 대하여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동일하게 거룩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기에 이 거룩함에 대한 감각은 둔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회중 안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얼마나 자주 우선으로 삼고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보내려는 메모를 검토하거나, 직원이나 당회, 교회 운영위원회, 제직회, 혹은 심지어 현관에서 사적으로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곱씹을 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 말들을 이 장소의 거룩한 정직성에 비추어 살펴봅니까? 우리가 하려는 일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평화에 기여하는지, 아니면 오직 파괴적이고 무너지게 하는 방식으로 교회 안에서 평화를 해치고 있는지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나 언약적 사랑을 보여주는 장소로서의 “예루살렘”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각자의 심령에, 또 공동체로서 어떤 특정한 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강단, 세례대, 그리고 성찬상이며, 이것들이 은혜의 통로이자 수단이라는 믿음입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다른 교회로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교회와 각각의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사역을 덜 경이롭게 여기게 하거나 무디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대강절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내려오셨음을 상기시켜줍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각자와 각 회중에 성령으로 거하실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언의 포괄성은 시편122편에 나타난 거룩한 열정을 약화시킬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곧 하나님을 예배 가운데서 만나러 가고자 하는 열정, 그리고 성령께서 각 예배의 처소가 번영하도록 도우시기를 바라는 끊임없는 소망 말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최근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교회”는 특별히 구별되지 않는 여러 사회적 기관 중 하나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가정, 직장, “제3의 공간”(스타벅스 같은), 로터리 클럽, 요가실 또는 플래닛 피트니스, 파네라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 이 장소들에 “가며”, 우리가 차를 타고 “교회에 간다”는 것이 운동하러 “플래닛 피트니스에 간다”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집니다.
심지어 건축학적으로 어떤 현대 교회 건물들은 현대 사무실 단지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고급 커피와 간식을 파는 스타벅스를 모방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시편122편에서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시인처럼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경이로움을 갖도록 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시편 122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