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3 주석

이 짧은 시편 전체가 더 큰 시편 안에 포함되어 있다면, 적어도 2절은 Lectionary가 지나쳐 가길 기대할 수 있는 종류의 구절입니다.  제가 다른 설교 주석에서 자주 언급했듯이, Lectionary는 원수나 다른 불쾌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나 선동적인말을 건너뛰는 것을 좋아합니다.  시편 123편에는 그런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2절의 노예 이미지는 나름대로 불편한 느낌을 줍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비유는 아닙니다.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남자 노예와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자 노예의 두 이미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 이미지는 노예가 주인이 자신을 때리기를 예상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미지인가요?  아니면 긍정적으로 주인이 노예에게 손을 내밀어 괜찮다는 표시를 하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이 이중 이미지에 이어서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는 희망이 뒤따르기때문에, 시편기자는 어떤 종류의 형벌이어야 할 것 같은 두려움과 그 반대인 자비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때릴 것인가 아니면 축복할 것인가?

이런 이미지나 비유는 불쾌합니다.  오늘날 어떤 목사도 그런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노예 제도 자체가 우리가 당연히 불쾌하게 여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이미지 뒤에 내재된 두려움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지시하신 하나님과 연관된 사랑의 친절과 자비의 하나님보다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마르시온 주의적 (Marcion: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을 따로 보는 이단) 개념에 더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시편 123편에는 그런 난해의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이면에는 그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대적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에 지치고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경멸한다고 이 시편은 말합니다.  오만한 자들은 우리를 조롱합니다.  이제 우리를 위해 오셔서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러면 대적들에게 누가 누구인지 보여줌으로써 상황을 역전시켜 도리어 조롱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비열한 저격수와 비열한 비평가들아, 이제 누가 진짜 세상의정상에 있는지 봐라!”

하지만 이 또한 다소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불신자나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지위를 가지고 군림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삶의 주요 동기 부여 목표가 되어야 할까요?  최근 몇 년 동안 소위 신 무신론자들은기독교 신앙 (일반적인 모든 종교적 신앙은 아니더라도)을 폄하하고 비하하는 것을 공공연히 즐겨왔습니다.  다니엘 데넷, 크리스토퍼 히친스, 리처드 도킨스 같은 이름은 특히 기독교를 시대에 뒤쳐지고, 미개하고 퇴행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이러한 지속적인 노력에 관심을 기울여 온 사람들에게 많은 경종을 울릴 것입니다.

이들은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요정이나 물귀신을 믿거나 단풍나무와 참나무에 깃든 정령들을 숭배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무신론자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합니다.  21세기의 어떤 사람이그런 세계관과 인생관을 평생 동안 열렬히 헌신한다면 아니 잠시라도 믿는다면 그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빈정거립니다.

그러니 이런 신앙의 대적들이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을 인정합시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철저하게 혼쭐이나고 종교적-철학적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을 인정합시다.  하지만 이런 인물들에 대한 심판과 복수의욕망에 빠지는 것이 정말 우리가 취해야 할 첫 번째, 최고의 마음가짐 일까요?  예수님의 모범이 우리를 다른, 더 나은, 더 자비로운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죠.

하지만 우주적인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러한 심판의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모든 무릎이 꿇고모든 혀가 예수를 주라 시인할 것이라는 빌립보서 2장과 바울의 말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이”그를 찌른 자들까지” 그를 보게 될 것이라는 요한계시록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세요.  그러한 구절에서 예수님을 온세상 만주의주, 만왕의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신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세상 모든 사람이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 쯤이면 우리는 대적들이 부끄럽게되는 심판의 욕망도 끝났을 것이고, 비판자나 문화적 비평가들에 대한 복수 욕구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때 쯤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기독교인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사람들까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시편 123편에서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는 자비는 어쩌면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바라는 자비일지도 모릅니다.

시편 123편이 전적으로 부적절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이 본문을 읽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노예처럼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 바라는 심판도 은혜와 자비로 가득한 방법으로임할 것임을 압니다.

예화 아이디어

시편 123편에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지만, 이 시편을 깊이 생각하면서 이 시편이 비판자와 적에 대한 변호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 바라바의 성격에 관한 프레드릭 뷰케너의 저서에서 언급한 내용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예수에 대한 재판과 심문이 끝날 무렵 본디오 빌라도는 피에 굶주린 군중에게 예수와 범죄자 바라바 중 누구를 석방할 것인지 선택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군중은 진짜 범죄자는 풀어주고 범죄자가 아닌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외쳤습니다.  물론 뷰케너는 이 장면이 예수의 동료 유대인이 다수 포함된 군중들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뷰케너는 예수님에게도 같은 선택권이 주어졌다면 바라바를 풀어주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