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8  주석

비록 8절에 불과하지만 시편 138편은 꽤 대단한 위업을 달성합니다: 히브리 시편 전체의 주요 주제들 대부분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몇 안되는 구절에서 언급되는 기도들과 주제들의 종류를 목록으로 만들어 봅시다:

–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서원

– 특히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분의 신실하신 사랑, 그분의 은혜를 찬양하겠다는 서원 – 도움을 청하는 부르짖음에 응답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

– 모든 왕과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부름 – 지존하시지만 낮고 가난한 자들을 특별히 존대하시는 하나님임을 인정 – 인생은 때때로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물리쳐 달라는 요청

–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을 찬양하는 마무리

시편 138편이 빠뜨린 것이 있습니까? 찬양, 감사, 애통, 불만의 암시, 하나님의 가장 훌륭하고 칭찬받으실 만한 특성들 언급,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열방을 향한 부름, 등등. 이것은 정말 전체 시편의 미니어처 입니다.

아마도 이 짧은 시편의 이러한 방대함이 설교자들에게 도전이 될 것입니다. 하나의 설교는 결국 단 하나의 주제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규칙을 따른다고 가정해 봅시다. 자, 열 가지 주제가 담긴 시편으로 무엇을 합니까? 한 번에 한 구절씩 8주 동안 시편 138편만 사용하여 기도에 관한 설교 시리즈를 할 수 있습니다. 단 하나의 짧은 시편으로 두 달을 설교하는 것을 권장하지는 않지만 요점은 여기에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숙고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시편 138편을 가지고 단 하나의 설교를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설교자는 어떻게 그것을 성취할 수있습니까? 우리는 이 시편의 전체 그림을 보고 이 시편이 어떻게 우리 각자의 삶이 다양하고 질감이 있으며 결코 한 가지 기분이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하나의 긍정적인 감정이나 체험으로 결코 포착될 수 없습니다. 낙관적인 성경 구절을 벽걸이에 걸어 놓고 당신의 하루가 어떠하든지 성경 구절의 행복한 말씀을묵상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감격스런 찬양의 날들도 있고 어두운 골짜기의 날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친구들도 있고 적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불가피하게 다른 경험들로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좋지 않은) 이어질 여러가지 일들을 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증인으로 부름 받았고 열방을 향하여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요청하는 사명도 받았습니다. 그것은 고대 근동에서 인기 있는 일이 아니었고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 사회에서도 확실히 인기 있는 일이 아니지만 그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낮고 가난하고 가장 연약한 사람들을 존대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본받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여러 시편 에서 (시편 8편, 113편) 놀랍게 낮아지시고, 우리 인간들이 종종 주목하지 못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주목하시는 하나님을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종종 보지 못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이 진리를 친히 실천해보이셨습니다). 정의를 위해 일어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해치는 부패를 고발하는 것이 항상 가장 안전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본받는 우리의 소명입니다.

따라서 이 작은 시편의 큰 그림은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의 다양한 경험과 동일한 하나님을 다양한 방법들로 증거하도록 부름받았음을 모두 가리킵니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우리가 있는 모든 곳들과 보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연결됨을 볼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임재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증인의 역할을 감당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고대인들이 말했던 것처럼 삶을 사는 것은 코람 데오(Coram Deo) 또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을, 특히 종교적 믿음, 나누어 구획화하려는 현대적 경향에 위배됩니다. 특히 종교의 자유가 있는 자유사회에서 종교의 자유란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으로 대부분 해석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직장이나 학교에 가지 않아 집에 있을 때만 하는 주말 취미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편 138편이 묘사하는 헌신적인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한가지 분명히 하자면, 이것은 자유 사회에서 공립학교가 교실에 특정 신앙의 상징을 게시함으로써 특정 신앙을 다른 신앙보다 우대해야 한다거나 정부 건물이나 법원이 다른 종교들보다 한 종류의 종교적 상징이나 기념물에 특권을 부여해야 한다는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한 환경에서 일할 때 그들의 믿음이 그들과 함께 있어 거기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조용하고 비강압적인 증인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어도 교회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직장에서 말하거나 행동할 수는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요일에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어떻게 대하시는 가를 듣고 나서 나머지 일주일에 5~6일 동안 그와 상반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날 그날의 뉴스를 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주어진 직업이나 삶의 지위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는 다를 것이며, 우리 설교자들은 이것이 쉽다는 인상을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또한 이러한 모든 일을 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라는 인상을 남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실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단지 하나의 공구를 주면서 그들의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그공구로 모든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성령께서 이러한 일들을 완수하는 충실하고 창의적인 방법들을 일으켜 주실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시편 138편은 우리가 이 시대의 “신들” 앞에서

(138:1) 고투를 계속하도록 격려합니다.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참된 본성과 성품을 증거하기 위한 고투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20세기 후반의 그 어떤 작가들보다 Frederick Buechner은 우리의 일상과 영적 믿음을 잘 연결했습니다. “당신의 삶에 귀를기울이라”는 그의 글에서 일종의 공통주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서나 당신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의 삶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또는 한때 Buechner가 사용했던 또 다른 이미지는: 인생은 때때로 히브리어 알파벳과 같습니다; 모든것이 자음이고 모음은 없습니다. 그 자체로는 발성이 불가능한 모두 딱딱한 소리입니다. 물론 원어민 히브리인들은 그 언어를말하고 발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떤 자음 사이에 어떤 모음 소리를 넣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Buechner는 그것이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음을제공합니다. 마치 뒤죽박죽의 자음 같은 우리 삶속으로, 결국 모든 것을 사랑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모음을 은혜로받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 주석에서 시편 138편에 대한 나의 해석과 100% 연결되는 지는 확실 하지 않지만, 삶의 모든 것이 어떻게하나님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시편의 넓은 관점이 이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