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7:12-20 주석

전 세계적으로 또 다시 힘겨운 한 해를 보내고 2022년을 시작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3년 차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 중 상당수는 최악의 상황이 3주를 넘지 않을 것을 희망했습니다. 3개월도 상상하기 힘들었는데,벌써 3년째 라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네요.

그래서 새해가 시작된 이 날, 하나님이 이 땅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얼마나 특별하게 여기시는 지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인 이 시편과 마주하는 것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시의 문맥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어떤 것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강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안에 평화를 주셨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반적으로 따뜻하고 안전한 환경을 제공하셨다는 긍정적이고 밝은 진술들입니다. 두 번째는 시편 147편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에 대한 찬양과 이스라엘이 그것들을 알고 있었던 것이 너무나 큰 축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방 민족들은 그것들에 대해 알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알았다는 것이 하나님이 그들을 그토록 특별하게 대하신 이유입니다.

이 두 가지가 놀라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이 시편이 바벨론 유배 이후  어느 때에 최종 편집되고 편찬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요새화되어 있지 않았고, 이스라엘 안에 평화가 전혀 없던 시기 이후에  말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벌하신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와 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시편 147편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모습을 찬양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이 행복한 안전과 순종의 그림은실제로는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아니면, 기껏해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때때로 발생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BC 587년 이후에 이런 노래가 사람들에게 불편했을 것입니다. 몇 년 후,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조차 예루살렘이 이전 영광을 되찾은 것을 보지 못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로부터 AD 70년 예루살렘의 두 번째로 멸망으로 흩어질 때까지 그곳은 점령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런 역사적이고 영적인 현실을 감안할 때, 이 시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이 시편은 렉셔너리 C년 첫 번째 주일에 배정 되어 있고, 1월 6일 주현절을 4일 앞둔 상황입니다. 방금 끝난 휴가 기간이 인생 뒤편으로 사라져가고 있고, 모두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준비’는 잘못된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 새해를 ‘대비’한다고하든지, 누군가 “팬데믹은 끝났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2022년 이전의 모든 것이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그때와 지금, 모든 것이 동등하다고 해도, 시편 147편의 행복한 평온함에 대한 묘사는, 영적이든 아니든, 지금 우리 삶에도 쉽게적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편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읽어낼  방법이 있을까요? 또는, 신앙의 눈으로, 이 시편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시편에 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밤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어떻든, 그리스도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이라는성채 안에 있으면 언제나 영적인 평안과 희망, 심지어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그들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 우리에게 적지 않은 위로를 줍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자신을 율법의 마침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이 끝났다는 의미의 ‘마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이 지향해 왔던 모든 것의 목적이자 정점으로서, 즉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번성한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이 그 ‘마침’이 되셨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율법은창조물에 대한 사용 설명서이며, 사람들은 이를 따름으로써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이 땅에서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의 일부로서 그들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위험한 일을 하지 않도록 경고를 받았습니다).

시편 147편 전반에 걸쳐, 엄밀히 말하면 이 강해의 일부가 아닌 처음 11절을 포함하여, 창조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하심, 그리고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로 거듭 언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것입니다. 비와 눈과 우박과 바람, 그리고 하나님께서 숙련된 예술가처럼 나무와 들판을 흩뿌리시는 서릿발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시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동시에 그들의 번영을 돕기 위해 율법, 곧 토라라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랑의 계시가 담긴 거대한 패키지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 분은 구원자이시며, 창조의 주인이자 왕이십니다. 우리가 지금 세례를 통해 그 분 안에 거하고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아직 오지 않은 모든 선함에 기대어 있고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새해 첫 날이 가져다 주는 낙관주의가 사상 최저 수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최근 다른 글에서 언급했듯이,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공급망 중단 소식에 의해 희망 자체가 희생양이 된 듯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위해 최선을 원하신다고 믿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을 이기시고 언젠가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 뿐입니다(이번 주 구약성경 본문인 예레미야서 본문이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붙잡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희망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우리가 계속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 주기도 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시편 147편은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세계 안에서 얼마나 활동적인 분인지에 대해 찬양하는 수많은 시편들과 본문들의 한 예입니다. C. S. Lewis는 하나님과 창조 세계에 관해서 우리가 항상 두 가지 다른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쪽에서는사람들이 하나님을 창조 세계에서 완전히 배제시킵니다. 이것이 이신론적 관점인데, 우주는 신이 오래 전에 태엽을 감아 놓은 거대한 시계 같아서 그 이후로 하나님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거의 또는 전혀 없이 (창조물 내에서 어떤 신적활동도 하지 않고) 그냥 저절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다고 봅니다. 다른 한쪽의 극단에 있는 범신론자들과 그와 유사한 학파 사람들은 창조 세계 자체를 하나님(또는 하나님의 일부)으로 여길 정도로 신을 창조물과 밀접하게 동일시합니다. Lewis는 두 극단모두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시편 147편이 보여 주고 있듯이, 하나님과 창조 세계는 서로 구별되지만, 하나님은 창조 세계에 친밀하게 관여하시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시며, 비와 눈을 내리시고, 동물과 모든 피조물을 돌보십니다. 얼마나 조화로운 행위입니까?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 세계에서 배제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여전히 우주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예컨데 하나님이 당신의 채소밭에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동시에 하나님이열정적으로 관여하고 계심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의 다른 많은 분야에서 그러하듯, 정통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두 영역 모두인 경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