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5:1-10 주석

앨런 블룸은 몇 년전에 쓴 그의 책인 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에서 미국 대학들에서 진정한 교육이 쇠퇴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블룸은 최신 유행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환영하면서 전통적인 문학 노선과 단절하는 많은 교수들의 방식을 성토했습니다. 그는 비판적 사고와 명철한 분별력이 포스트모던 순수성의 상징인 ‘열림’에 의해 대체된 현실에 대해 탄식했습니다. 블룸은 슬프게도 교육받은 사람의 기준이 날카롭게 연마된 사고를 가진 사람이 아닌, 모든 것에 열려 있으면서 아무 것도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변했다고 썼습니다.

한편, 마크 놀은 그의 책인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블룸이 그의 책을 출판한 시점과 비슷한 때에 발간되었다)에서 기독교계 내에서도 교육의 현저한 쇠퇴 현상에 대해 안타까워했습니다. 놀은 뛰어난 과학자, 정치 분석가, 역사가, 경제학자, 또는 작가로 인정받는 복음주의자가 극히 적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탄식했습니다.

블룸과 놀이 그들의 책들을 집필한 이후 많은 면에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1980년대의 두 저자는 오늘날 사람들이 깊이 숙고한 개념이나 원칙인 것처럼 자신들의 의견을 경솔하게(그리고 오래 고민하지도 않은 채) 내던지는 사회 관계망과 스타일을 예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놀과 블룸은 신중한 논증과 사유가 사라지고 케이블 뉴스에서 분할 화면 속 고성이 오가는 논쟁이 이를 대신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시편25편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이유입니다. 이 고전적 시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나 모티브가 있다면 그것은 인생의 도전에 대응하는 방법이 바로 더 깊은 교육과 훈계를 받는 것이란 점입니다. 시편25편을 읽을 때, 저는 이 시의 철저한 현실성에 이끌리는 저의 모습을 봅니다. 이 시의 구절들의 리듬과 패턴속으로 들어가 보면, 아마도 자신의 삶과 비슷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의 여정이 일종의 시소와 같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강하고 충만한 시기가 있는가 하면, 메마르고 연약한 시기도 있습니다. 분명히 이 히브리 시인의 경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시편25편의 다양한 부분들이 어떻게 서로 교차하며 엮여 있는지를 한 번 살펴보세요.

한편으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영혼을 하늘로 들어올리며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을 여호와의 보좌 앞에 온전히 내어 맡기며,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간절한 열망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고난과 외로움, 그리고 슬픔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이어집니다. 자신의 본질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코 힘든 날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한편으로, 이 시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배우고 오직 그의 신성한 길을 따르려는 강한 열망을 표현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같은 시편에는 과거와 현재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는 구절들도 함께 등장합니다(이번 공과는 이러한 고백적인 구절들 중 일부를 생략하지만, 이들은 전체 시편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젊은 시절의 죄와 과오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지만 시인의 현재 삶 속에서 겪는 투쟁과 좌절 또한 숨김없이 고백합니다. 신앙의 삶이 항상 꽃길만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언제나 장미처럼 향기롭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한편으로, 이 시편에는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에게 보상하시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언약의 빛 안에서 살아가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장엄한 수사가 담겨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여전히 원수들의 올무과 함정에 직면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찬양과 탄식, 경건과 연민, 야망과 죄의 실패, 굳건한 소망과 실제적 상처 등이 있습니다. 현실의 삶에 대한 묘사가 이보다 더 정직하고 현실적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이 시편 기자는 이 시를 쓸 때에 실제 삶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시25편은 자음체(acrostic) 시 형식으로 된 히브리 시들 중의 하나인데, 시의 각 연이 알파벳 순서에 따라 다음 글자로 시작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 알파벳은 22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시편25편도 22개의 줄로 구성되어 있으며, 첫 줄은 “A”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글자와 함께 시작하고, 두 번째 줄은 “B” 글자로 시작하며, 마지막 줄은 “Z”에 해당하는 글자로 끝이 납니다.

자음체 시 형식으로 쓴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이 시를 암기하기 쉽게 하기 위함입니다. 당시에는 책이나 인쇄된 자료에 접근할 수 없었던 때이기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암기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만의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필요할 때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음체 시의 형식으로 시를 구성함으로써 시인들은 사람들이 이를 더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ABC 패턴은 일종의 기억 보조 장치입니다(10절에서 멈추지 않고 시 전체를 읽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시편 기자는 두 가지 이유로 이 시를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구성했을 것입니다. 첫째, 그는 자신의 시적 감정이 실제 삶과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 시는 죄와 고통, 상처와 실망이 가득한 실제 삶을 살아가는 동안 마음에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둘째로, 이와 똑같이 중요한 이유로, 이 시편 기자는 이 모든 삶의 다양한 경험 속에서도 항상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교훈을 담고 있는 이 시를 사람들이 암기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바로 암기하는 행위 자체가 핵심인데, 어떤 내용을 반복해서 되새기며 결국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죄의 해결, 고통을 지나가는 길,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을 붙드는 방법인데, 심지어 그 약속을 직접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순간에도 그 모든 것 속에서 이 시편 기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명백한 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쉬운 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다는고 해서 삶의 고통이 사라지거나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어딘가에 소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훈과 관련된 거의 모든 히브리어 동사와 동의어가 이 시편에서 최소한 한 번씩 사용됩니다. 시편 기자는 교육과 관련된 다양한 단어들을 독자들에게 쏟아붓기 위해 히브리어 유의어 사전을 깊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서도, 도움을 구하는 기도의 가운데서도, 삶의 깊은 골짜기에서 탄원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가르쳐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사실, 이 주제가 얼마나 자주 이 시편에 등장하는지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4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방식과 길에 관해 말합니다. 하나님께 그분의 길로 안내해 주시고 그것을 보여달라고 간구합니다. 5절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강조되며,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 진리로 인도해주시고 가르쳐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8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그를 훈계해주시기를 간청하고, 9절에서는 다시금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을 간구합니다. 12절에서 또 다시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한 요청이 등장하며, 14절에서는 야웨가 그의 언약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밝히 알려주시고, 그의 사랑과 신실하심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신실한 자의 태도는 하나님만이 제공하실 수 있는 지속적인 교육에 대한 겸손한 순종입니다. 오늘날 사람들과 달리, 아마도 역사의 많은 시대의 사람들과 달리, 이 시편 기자는 죄를 보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해결책으로 삼습니다. 그는 고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추가적 가르침을 통해 밝히 드러내실 수 있는 것을 바탕으로 그것을 이해하려 합니다. 그는 외로움을 겪으면서 그 외로운 시간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대해 더 깊이 배우기로 결심합니다.

우리는 “제자”를 “따르는 자”란 의미로 여기는데, 일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신약에서 사용된 본질적인 의미는 “학생”을 뜻합니다. 초기의 제자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기 위해 그와 동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흥미로운 선생으로 감지하고서, 그분의 발치에서 그의 놀라운 일들을 배우고자 하는 학습자의 핵심층에 속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학생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사건이 일어나는 곳에 가까이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우기 위해 스승을 따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제자”의 정의에서 따르는 자란 부분은 유지하면서도 학생이란 본질적인 부분은 소홀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하지만 그저 무리에 섞여 따라가는데 그치고, 예배에 참석하지만 깊이 생각하기 보다는 단순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보는데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 단순히 특정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이벤트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입니다.

하지만 예배가 일종의 오락이 되고, 설교가 곱씹어보고 숙고하는 교훈이 아니라 단지 구경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제자들은 배우는 자가 아니라 관객이 되고 맙니다. 예배를 하나의 수동적 오락 체험으로 여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가 되지만, 우리의 신앙적 배움을 일요일 한 두 시간만으로 제한한다면, 시편 25편의 태도를 전혀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 기자가 보여준 모범을 따라 삶의 풍성하고도 다양한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주의깊은 하나님의 학생으로서의 삶을 우리의 일상에 녹여내지 못할 것입니다.

시편 25편은 사람들이 쉽게 암기하고, 마음에 새기며, 일상의 한 부분으로 삼을 수 있도록 자음체 시 형식으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삶을 하나님의 발 앞에서 배우는 과정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예화 아이디어

얼마전에 저는 기억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인쇄된 자료는 기억를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지도록 돕기 위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글로 기록해 두었기에 암기하려는 행위는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우리가 늘 전화하던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기에 예를 들어, “질”에게 전화하고 싶으면 버튼만 누르면 됩니다. 하지만 만약 남의 핸드폰으로 “질”에게 전화해야만 한다면… 오늘날 “제퍼디”란 TV 퀴즈쇼에서 우승하고자 한다면 머릿속에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억은 필수가 아닙니다. 언제든지 구글에서 검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포함해서 많은 경우에 적용됩니다. 집 안 여기저기에 여러 성경책을 놓아두면, 언제든지 성경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내용을 암기하거나 묵상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핸드폰에 많은 양의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것이 머릿속에 저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듯이, 식탁 옆 선반에 놓여져 있지만 한 번도 펼쳐져 있지 않은 성경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씀들은 공중을 떠다니다가 어느 순간 저절로 우리의 일부가 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여러분의 일부로 만드는 것은 읽고, 깊이 생각하고, 암기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즉, 하나님의 제자(학생)가 된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