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5:1-9 주석

사무엘 존슨은 교육받기 보다는 상기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엌에서 야채를 썰고 다질 때에 칼을 안전하게 사용하는 기본 수칙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너무 바빠서 도마를 깨끗이 치우지 않는 바람에 칼을 사용하다가 삐끗해서 손가락을 다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을 나는 이미 전에 배웠습니다. 지금은 단지 그것을 상기시키면 됩니다.

물론 삶의 여러 문제에 대해 배울게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학습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교육을 통해서 생활 속의 다양한 일들을 알맞게, 적절하게, 정확하게 처리하는 방식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핵심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것을 안심하고 따를 수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보다 더 잘 아는데”라고 말하는 실수를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는지요? 실제로 우리가 더 잘 알 때도 있습니다만 상기시키는 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시편 25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교훈을 열망하는 시입니다. 히브리 시에서 이 주제를 강조하는 것은 이 시편만이 아닙니다. 몇 주 전 성구 시편으로 시편119편의 일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고자 하는 아주 긴 시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규칙, 규율 등을 배움으로 말입니다. 많은 시편들은 우리의 길을 비춰달라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달라고, 옳은 길을 알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로서- 신약에서 ‘제자’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는 기본적인 의미로 ‘학생’을 뜻하는데- 하나님의 길을 평생에 걸쳐 배우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것은 필수적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에 대해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고, 오래 전에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좀 더 자주 상기해야 합니다. 어떤 것들은 상식적입니다. 또 어떤 것들은 일반적 범주에 속합니다. 다른 부분들은 도덕적으로 매우 근본적이어서 역사 속 모든 문명화된 나라들의 법률에 거의 다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잘못하다 걸린 아이들이 “나는 그것이 못된 짓이란 걸 알지 못했어요” 라고 정직하게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성인이라고 그보다 더 낫지는 않습니다. 어떤 남성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 술집에서 술 몇 잔을 함께 마신 후 그의 호텔 방으로 가서 그녀와 더 대화를 나누자고 초대하는 것이 결국은 간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자기 아내에게  말한다고 해보지요. 그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진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를 알고 있습니다. 따로 배울 필요가 없이 상기시키면 됩니다. 우리는 좀 더 자주 스스로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에게는 상기시키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의 음성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더 나은 결정을 하도록 도우시며,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물론 성령께 귀를 기울이는 일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이 일은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시편 25편 같은 시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 성령의 음성을 듣는 영적 훈련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성령이 도덕적 나침반을 우리 내면에 심어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제자로서 우리는 평생 학습자이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행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평생 경험해야 합니다.

이 설교 주해를 결론짓기 전에 꼭 언급할 말이 있습니다. 삶에는 무엇을 해야 할 지 알기 어려운 많은 도덕적 회색지대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몇년 전에 유행했던 WWJD 팔찌와 티셔츠는-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란 로고가 있는-어떤 상황에서든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지를 기억나게 하는 손목의 팔찌를 차는 동안 즉시 답을 아는 것같이 느끼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어떻게 하실지를 아는 것이나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가 우리로 무엇을 말하고 행하게 하실지를 아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를 모른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약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강하고 현명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 경우에, 시편 25편의 말씀은 상기시키는 것 보다 배워야 하는 것에 더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모두 다 받아들이기 쉬운 것도 아니고, 때로는 답들이 오랜 시간을 요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알 수 없다고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어보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성구집에 나오는 시편 25편의 첫 아홉절의 마지막 구절은 겸손한자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극진히 여긴다고 말합니다. 겸손은 교만의 반대인데, 우리 자신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겸손은 지혜의 시작이며, 어리석음의 반대입니다. 흔히 말하듯이, 바보들은 실수할지언정 결코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배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매일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성령이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신앙인들은 현명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란 문구가 겉으로 볼 때에 좋아보여도 이것은 또 다른 질문인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하지 않으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행하지 않으실까?”로 대체되어야 하며, 적어도 함께 사용되어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행하지 않거나 말하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했다면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추한 말이나 행동을 피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절대 분노에 차서 이메일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동의하지 않는 댓글일지라도 상대방을 향해 비꼬는 투로 조롱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요즘 시대의 논쟁거리인 주제에 대해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을 향해 인격 모독적인 딱지를 붙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으실 것이며 반드시 언급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그것을 하실까요? 많은 경우 복음서는 우리가 행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확실하게 하지 않으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란 질문에 답하는 것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닐지라도,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라면 하지 않으실 것들을 우선적으로 없앤다면,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사는 세상은 훨씬 더 좋아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