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혹은 이 시편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은 이 시편을 거꾸로 쓴 걸까요? 시편 40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다만, 후반부 대부분은 주일 독서표에서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처음 약 10절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우리가 정확히 무엇이 이 시인을 그렇게 감격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 큰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절마다 감사를 쏟아 붓습니다. 게다가 그는 단순히 감사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회중 앞에서 증언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감사와 찬양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감사도 귀한 것이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여 다른 이들도 함께 동참하도록 초대하는 순간 그것은 찬양이 됩니다. 식당에서 웨이터에게 “요리사께 제 인사를 전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감사입니다. 하지만 트립어드바이저에 좋은 리뷰를 남겨 다른 사람들도 방문하도록 권하고, 동시에 요리사에게 직접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은 찬양의 차원입니다.
시편 40편의 시인은 이 두 가지를 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환난에서 건지셨기에 여러 번 감사했고, 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른 이들 앞에서 선포하여 그들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걸까요? 11절부터(그리고 본문이 끝나는 12–17절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게) 시편 기자의 삶에 다시 큰 혼란이 닥친 것처럼 보입니다. 시편 40편의 나머지 부분은 거의 탄식시처럼 들립니다. 시인은 또 다시 적들과 여러 어려움에 둘러싸여 간절히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처음 10절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신 것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했다면, 마지막 8절은 그와 정반대로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부르짖는 절박한 호소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의 절망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시편 40편의 앞부분은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노래인데, 뒷부분은 다시 간절히 도움을 구하는 탄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우연한 편집의 결과일까요? 혹시 마지막 8절이 원래는 앞에 오고, 그 다음에 감사의 노래가 뒤따라서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보여주는 구조였던 것일까요? 그렇게 보면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이야기가 한 흐름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고난에서 구원으로, 탄식에서 감사와 찬양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의 전개 말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 시편의 순서 — 감사에서 다시 절박한 도움의 부르짖음으로 이어지는 흐름 — 이 바로 시인이 의도한 구조라면 어떨까요?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던 시간이 지나자마자, 곧바로 불확실함과 시련의 시간으로 돌아서야 했던 순간 말입니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요? 주일에는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내게 너무나 선하게 행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불과 며칠 뒤 수요일이나 목요일쯤이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갑작스러운 병, 예상치 못한 실직, 혹은 마치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 듯한 재난이 찾아와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어떤 기도에는 응답하시고, 우리가 그로 인해 감사를 드린 직후 다시 응답이 없는 듯한 시련의 시간으로 돌아가게 하시는지 이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간구가 응답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매우 오랜 시간 동안 답이 없는 듯할 때, 우리는 ‘아까의 기도 응답도 착각이었나?’ 하고 회의하게 되기도 합니다. 회의적인 사람들은 “처음부터 우리가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믿은 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누군가의 암이 완전히 낫거나 호전될 때, 우리는 그것이 교회 성도들이 드린 모든 기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같은 교회 안에서, 똑같이 많은 기도가 그 사람을 위해 드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가 정말로 응답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우연에 맡기는 것일까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도를 통해 일하시며, 또한 기도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 응답을 경험했다고 고백할 때에도, 우리는 모든 끝을 다 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알지도 못하고, 사건들의 연결망을 다 알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믿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고 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시련이 다시 우리의 삶에 찾아올 때 그 끝을 미리 알 수 없다는 뜻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기도한다고 해도 우리가 인간적으로 가장 바라는 일이 왜 때때로 이루어지지 않는지 알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기도가 응답된 것처럼 보이는 경우조차 그 이유와 배경을 완전히 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는 겸손입니다.
시편 40편은 이 두 가지 진리를 모두 보여줍니다. 10절까지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차 있다가 11절 이후에 절규로 넘어가는 데서 오는 어색함조차도, 사실은 우리의 삶과 신앙 여정을 잘 반영합니다. 시편은 바로 이 때문에 존재합니다. 인생의 온갖 경험과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 한 편의 시편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시편 전체의 스펙트럼 속에서 우리의 인생을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 시편이 우리에게 주어진 참된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시편 40편의 시인처럼 하나님께 큰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만듭니다.
예화 아이디어어
C.S. 루이스는 기도에 관한 질문에 대해 인상적인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 문이 열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때로 하나님은 문을 열고 “그래, 내가 그렇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는 문을 열고 “아쉽지만 이번에는 안 된다”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경우에는 하나님이 문을 열고 우리를 안으로 초대하셔서 자리에 앉히신 뒤, 우리의 요청에 대해 대화하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즉 단순히 응답 또는 무응답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복잡한 이유가 있어서 시간이 걸리고 배우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루이스가 말한 좋은 소식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대화마저도 기꺼이 환영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함께하십니다.
시편 40:1-1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