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9:1-12 주석

때때로 우리는 시편이라 부르는 시들과 잠언서 같은 지혜문학을 구분 짓는 선이 매우 미세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시편 49편은 그 경계가 현저히 흐려지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사실, 시편 49편은 여러 잠언 구절들과 충분히 유사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지혜문학으로 분류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시편 49편은 잠언의 대표적인 주제 중 하나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재물의 속임수와 공허함, 그리고 재물을 쫓고, 결국 그것을 자랑하는 것을 인생의 전부로 여기는 이들의 어리석음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시편 49편에는 잠언에서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연장자가 젊은이에게 주는 충고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충고는 매우 직설적이며, 흔히 쓰이는 옛 격언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재물은 가져갈 수 없다.” 당신보다 돈이 더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초조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의 중심은 종종 매우 공허하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화려한 황금 저택에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우주의 시간 속에서 그들이 영원히 거하게 될 집은 무덤뿐입니다. 그리고 그 화려한 저택은? 결국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시편 49편의 핵심은 이것일 것입니다. 당신은 돈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돈으로 하나님과 거래를 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영원히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드는 위대한 평준화 장치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상류층도 하류층도 없고, 사회·경제적 구분도 없습니다.

잠언이 말하는 것처럼, 또 다른 성경의지혜 문학인 전도서도 냉정하게 말하듯이,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강한 자와 약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 똑똑한 자와 무지한 자, 모두 결국은 죽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같은 방식으로 죽습니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실제로 12절은 말씀합니다. “당신은 말이나 돼지나 소와 다를 바 없이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땅을 떠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탄생이란 결국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조건으로 향하는 시작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12절까지의 본문 속에는 또 다른 질문이 흩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삶이 구속받거나, 값을 치르고 되찾아질 수 있는가? 분명한 것은, 세상의 모든 돈을 모아도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무언가, 혹은 누군가, 이 일을 이루실 수 있는 가능성은 있는가? 시편의 전반부는 그 가능성을 은근히 제기하지만,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력 본문이 12절에서 이 시편을 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이 시편의 후반부를 보면, 분명히 의인들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이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죽음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니 그가 나를 자기에게로 데려가시리로다.” 이 구원이야말로 의인들의 운명을 어리석고 악한 부자들의 운명과 확연히 갈라놓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짐승처럼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도 아무런 희망 없이 그렇게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회력 본문에서는 이 시편을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와 함께 묶어 놓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수사적 질문입니다. 그 답은 분명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돈으로 되찾을 수 없다.” 재물로 그것을 살 수도 없고, 부를 쌓는 동안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다른 길도 스스로 막아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보면, 그리 아름답지 않은 현실이고, 즐겁지도 않은 전망입니다. 하지만 부자들이 이 땅에서 정말 잘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불편한 진실로부터 스스로 주의를 산만하게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을 전혀 마주하지 않고, 마지막 심장이 멈춘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고민조차 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운 것이 있다면,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성찰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고대의 격언이 있지만, 그래도 당장은 즐겁게 느껴질 수는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의 재물의 한계를 깨닫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진지하게 살아가는 부유한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49편을 설교하면서 부자들은 모두 지옥에 가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식의 흑백논리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삶의 기초를 전혀 성찰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도 부자 못지않게 많습니다.

시편 49편이 성경의 지혜 전통에 속한다면, 우리는 잠언의 핵심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혜를 적용하는 데에도 지혜가 필요하다.” 잠언에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격언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에 있어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어리석은 자를 강하게 책망해야 그를 그의 어리석음에서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런 자를 조용히 피하는 것이 낫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상황을 지혜롭게 분별하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한 일반적인 통찰로서—그리고 지혜란 바로 그런 깊이 있는 통찰을 의미하는 것이기에—꽤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부자들이 돈을 쫓고, 돈을 자랑하는 데에 바빠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결코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주의 깊은 진리를 일찍 깨닫지 않는다면, 결국 너무 늦어버리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가서야 재물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미 오래전에 다른 영적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닫아버렸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유명한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지막 유언으로 전해지는 말과도 연결됩니다. “나는 지고 있어 (I’m losing).” 어쩌면 그는 정말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았다 (I did it my way)”를 인생의 대표곡으로 삼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결국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착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화 아이디어

다음은 제임스 W. 존스가 그의 책 『In the Middle of This Road We Call Our Life』(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이 길 한가운데서)에서 쓴 시적이면서도 (반드시 기독교적이지는 않지만) 깊이 있는 통찰입니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길 바라는 일이지만, 재물에 정신을 빼앗겨 바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배우지만, 그들의 인지적 틀 안에서 하나님을 구름 위의 큰 궁전에 사는 거인으로 상상할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테디베어에게 말하듯 하나님께도 말하며, 어린 시절의 중요한 문제들을 ‘그 분’과 상의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면, 그들은 자신만의 환상적인 에덴을 떠나게 됩니다. 학교에서 그들은 구름 너머에 있는 것은 거대한 궁전이나 자상한 거인이 아닌, 끝없이 구부러지며 스스로 접히는 공간의 곡선들뿐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거기엔 궁전도, 자상한 거인도 없습니다. 그저 무한하고 고요한 공허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아이는, 이제 젊은 남성이나 여성이 되어, 점차 하나님에 대한 말을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언젠가, 자신의 신생아의 얼굴을 들여다보거나, 거친 바다의 맹렬한 아름다움이나 산의 고요한 웅장함에 압도되거나, 부모나 친구가 묻힌 무덤 앞에 서거나, 마음속 깊은 동굴에서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두려움과 불안을 씨름하는 순간, 이제 어른이 된 그 남성이나 여성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윌리엄 제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무 이른 시기에 현실과의 관계를 청산했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에는 어떤 철학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더 깊은 차원의 실재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어른이 된 아이는 다시 하나님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구름 위 궁전의 거인이나 하늘의 큰 경찰관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신비로운 거룩함과 연결되는 길로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