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1:1-12 주석

이번 학기에 저는 칼빈 신학교의 시편과 지혜서 과목의 공동 강사입니다.  지난 주에 시편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관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과거에 학생들의 설교가 틀어졌던 경험을 바탕으로 제가 항상 경고하는 한 가지는 절대로 시편의 부제를(superscriptions) 설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다윗의 시편”라는 일반적인 부제이든,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동굴에 숨었을 때” 또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칠 때”와 같이 특정 시편의 기원을 언급하는 부제이든, 사실 부제는 시편의 히브리어 본문에 원래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중에 추가되었으며, 어떤 전통도 시편의 부제들을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 말씀의 일부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특정 시편이 언제 쓰여졌을지에 대한 누군가의 추측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추측 뒤에는 더 오랜 전통이 있었을 수도있고, 그 중 일부는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설교를 하라는 과제를 받았을 때, 학생들이 부제에 언급된 이야기로 눈을 돌려 열왕기상서 설교를 하다가 실제 시편을 잘못 강해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저는 학생들에게 부제에 얽매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부제에 언급된 이야기에만 매달리다 보면 실제 시편에서 그 이야기에 맞지 않는 부분은 무시하게 될 수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시편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시편 51편에 붙은 부제는 그 길이와 구체성으로 인해 주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하나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제를 읽으면 많은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실제로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간음과 살인의 죄를 지적하고 난 후에 다윗이 스스로 이런 말을 썼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참회하는 고백의 시편인 만큼, 이 말씀은 우리인생의 어느 순간에 우리가 얼마나 추악하고 죄 많은 존재인지 스스로 놀라게 될 때에도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시편 51편을 설교할 때는 밧세바에 대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덧씌우지 말고 실제 본 시편의 내용이 설교의 핵심이 되도록 하세요.  사실, 시편 51편을 그렇게 밧세바 이야기와 연결시켜 구체적으로 설교하는 것은 일부 청중을 이 시편과 멀어지게 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바람을 피워 아이를 낳고 그 여자의 남편을 죽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아니라 영화나 연속극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내가 죄인일지 는 몰라도 그렇게 악랄하지는 않지… 다윗이 저지른 범죄와는다르지!”

도리어 시편 자체가 우리의 드문 악행이 아니라 우리의 흔하고 일상적인 본성과 성향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고, 이 말씀이 정말 큰 범죄에만 적용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게 중요합니다.

밧세바 사건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시편 51편에서 시편기자가 한 가지 특정한 죄나 행위에만 초점을맞추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용된 범죄, 죄악 등과 같은 단어들은 복수입니다.  “죄”라는 단어만 사용된 경우에도, 이는매우 특정한 상황에 국한된 고립된 행동이나 일련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악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일 가능성이높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의 삶과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외면하는 지속적인 성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원죄’라고 부르는 이 죄의 경향은 우리 각자가 잉태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며, 태어날 때 타락한 상태로 세상에 나온다고 아주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시편 51편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다거나 펠라지우스처럼 모방을 통해서만 죄를 배운다는 식의 성선설 관념을 배제하는 성경의 핵심 구절 중 하나입니다.  시작부터 우리 자신을 내버려두면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샬롬을 훼손하는 나쁘고 이기적인 선택을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죄성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시편에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 공감을 얻지 못하는 부분 중 하나는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늘 자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잘못된 행동이나 말, 상상을 하고 그것을 알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사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심지어 우리를 괴롭히는 과거의 죄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고 믿는다 해도, 우리는 항상 쉽게 용서하지 못하며, 우리가 한때 이런저런 나쁜 짓을 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는 어떤 일들에 대해 우리 자신을 쉽게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으로 간주하실 만한 많은 것들이 항상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즉 우리가 늘 자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현명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저지른 모든 샬롬의 위반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하나님께 우리의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할 줄 압니다.

시편 51편은 매우 짧지만 매우 현명한 “예수 기도”의 지혜를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짧고, 핵심을 찌르며 정확합니다.  시편 51편을 열두 단어로 요약한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우리가 흔히 “천국”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형태와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한적이 있습니다.  볼프는 우리가 새롭게 성화된 상태에서도 이 세상에서 나빴던 것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다고추측했습니다.  아마도 선에 대한 우리의 의식적인 인식은 선과 악을 대조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우리는 악이 무엇인지 알지만 결코 악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볼프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넘쳐나서 다른 것에 대한 시간이나 욕망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에 대한 우리의 탐험, 서로에 대한 순수한 기쁨은 다층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쁨의 패턴으로 이루어진풍성한 만화경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주의 다음 모퉁이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은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흥미진진한 삶이 될 것이며, 이것을 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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