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설교주석은 2020년 5월 17일에 공개되었던 것입니다.
이번 COVID-19 기간은 우리에게 어떤 것입니까? 탄식의 원천입니까? 시험의 시기인가요? 10년 후, 우리가 이때를 되돌아 보면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그저 끝났다는 사실이 뛸듯이 기쁜 그런 최악의 시간들 중 하나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 시기를 지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을 뿐아니라 믿음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 주신 것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감사를 할 수 있었던 시간입니까?
두 달 전에 이 시편 66편을 읽었다면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이 첫번째로 떠오릅니다.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RCL은 시편 66편의 처음 일곱 구절을 건너 뛰고 있습니다. 대부분 찬양과 감사로 구성된 사랑스러운 감정들에 대한 구절들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8절로 가보면, 여러 사건들의 흥미로운 결합이 보입니다. 시편에서 자주 발견되는 포괄적인 진술 중 하나인, 하나님이 결코 누군가의 발을 미끄러지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일부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결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기다려 보십시오. 그 다음에 알게 되는 사실은 시편 기자가 뒤이어 꽤 어두운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적들이 승리했을 때, 사람들이 감옥에 던져졌을 때, 불과 물의 시련을 통과하면서 무거운 짐을 짊어질 때(이 시편은 홍해를 건넌 사건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아마도 이집트 노예 시대를 언급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와 같은 상황들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입니까? 하나님이 모든 나쁜 일들을 막아 주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좌우로 미끄러질 때가 있고 또는 나쁜 일들이 들이닥칠 때가 있다는 것입니까? 당연히 둘 다 가능합니다. 제가 CEP 웹사이트에 있는 제 시편 설교 주석에서 반복해서 지적했던 것처럼, 주어진 시편을 읽을 때에는 항상 다른 149편의 시편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시편 121편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매일 허락되는 푸른 하늘과 햇살 같다면 시편 10편과 13편와 같은 애가들은 반드시 그런 때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시편 안에서 동전의 양면처럼 두 면을 모두 보게 될 때가 있는데, 지금 이 시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본다면, 이 시편의 기자는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주시고 더 나은 날들과 풍요로운 곳들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지만, 처음에 들이닥친 것은 끔찍한 날들과 깊고 절박한 필요 내지는 결핍의 장소들이었습니다. 시편 66편이 제시하는 회고에 따르면, 과거의 나쁜 날들은 시험의 때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셨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 고난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상대적인 주도권에 대해 우리가 어떤 식으로 분석하든, 그분은 그 당시 그곳에 머물러 계셨고, 그 기간들이 시험의 시간이 되게 하시거나, 더 강한 믿음과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를 가져오는 시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물론, 애가 시편들이 증언하는 또 다른 것은 필요와 고통의 어려운 시기에는 감사의 마음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는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고통 가운데서 결코 감사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할 것이 확실합니다. 절대적으로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이 극단의 상황에 처하게 될 때(하나님의 부재가 느껴지는 상황) 애가 시편들은 그 버려진 느낌을 크고 분명하게 외칠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수의 손에 붙들려 고통 받고 있을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 그 원수들을 물리쳐 주시고 그 고통을 끝내 주시기를 간구할 것입니다. 지금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죽었을 때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것이 꽤나 어렵다는 것과 따라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성가대의 일원으로 유지하기 원하신다면 여러분의 상황에 개입하셔야 한다고는 것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립니다. ‘오 하나님, 저를 이곳으로부터 당장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때로는 그 구원이 임합니다. 더 좋은 날들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어려웠던 시기들을 되돌아 보면서 분석해 보려고 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인들 중 일부를 완전히 잃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정도로 목회적으로 정직해 봅시다. 결코 이해되지 않을 만큼 엄청나고 극악무도한 일들을 겪는 사람들이 늘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일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시험의 때로 보이지 않고, 그러한 좋은 결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삶에는 시간이나 위로에 찬 목회적 권면으로 치유할 수 없는 깨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세상이 얼마나 깊이 망가져 있는지 상기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영구적으로 상처 입은 이 사람들이 그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들, 예를 들어 치유 되었고, 구원 받았고, 생각보다 상황이 더 잘 풀렸던 것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영적 성장,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나 다른 이들과의 더 깊은 관계, 더 성숙한 회중이 된 것, 더 노련하고 민감한 목회자가 된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어려운 시기가 결과적으로 시험의 기간으로 보일 것입니다. 처벌이 아닙니다. 운 좋게도 지금 막 괜찮은 것으로 판명된 하나님의 유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참을성 있게 머물러 계셨고, 어떤 방식이든 구원과 더불어 통찰력, 성장, 성숙, 더 깊은 믿음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그 사실을 증언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복을 받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비로소 찬양의 제사를 반복하면서 시편 기자와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COVID-19 기간에 설교하는 우리 모두에게 한 가지 목회적인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미래의 희망에 대해 성급하게 말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애가가 여전히 중심에 있더라도, (많은 시편에서와 같이) 어떤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희망을 붙들고 있다면,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이 위기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었던 시편 66편의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희망을 제시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그 희미한 빛을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고, 그 조차 보지 못하거나 볼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상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위기의 시기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임재하심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우리가 충분히 축복받은 상태에서 이 모든 것을 되돌아볼 수 있을 때 모든 것의 미래의 모습일지 보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 당장 시편 66편을 설교한다고 지금의 위기가 해결되거나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하나 하나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기회는 제공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깊은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목회적 돌봄과 더불어 설교자들이 항상 해야 할 그 일, 즉 희망을 선포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아이디어
최근에 돌아가신 르위스 B. 스미드스(Lewis B. Smedes)는 이 명쾌한 설교에서 정직하고 진실하며 깊은 영감을 주는 방식으로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정직이라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스미드스가 희망의 본질이 양날의 검과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한편으로 힘을 실어주고 고상하게 하며 계속 나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을 아프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거친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의 이면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그것을 놓아 버리고 싶은 유혹이 생기게 합니다. 희망은 너무나 자주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스미드스가 마지막 부분에서 놀라운 설교로 말한 것처럼, “계속해
희망하고, 계속해서 희망하고, 계속해서 희망하십시오.”
시편 66:8-20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