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그리고 주일학교에서 인기 있는) “야곱의 사다리” 이야기 안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거나 무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윤곽은 익숙하며 창세기 본문과 일치합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속임수로) 형 에서로부터 가문의 축복을 가로챘고, 그의 분노를 피해 도망 다니고 있습니다.
지쳐 쓰러질 정도로 최대한 멀리 달려온 야곱은 돌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천국의 계단 (또는 사다리이거나 그것이 무엇이든) 꼭대기에 있는 신성한 인물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 하늘과 땅의 경계가 약간 허술한 “얇은 곳” 중 하나에 우연히 발을 디뎠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곳을 “벧엘” 또는 “하나님의집”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 다음이 바로 우리가 보통 놓치는 부분입니다: 야곱은 조상들의 하나님께 “좋아요, 하나님, 만약 저를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저는 그가 만약이라고 한 이 부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 되게 하고 당신을 경배하며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장, 사기꾼, 속이는 자인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겠다고 한 꿈을 꾸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어떤 것을 이루어 주신 후에야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그 일에 보답하겠다는 것입니다.
시편 71편과 같은 시 안에도 비슷한 역동성이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렇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자신의피난처이자 힘이라고 주장하며 (많은 시편이 그렇듯) 하나님을 계속 찬양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목하십시오: 이 모든일이 일어나고 계속되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자신의 몫을 감당하셔야 합니다. 교활한 늙은 야곱이 표현한 것과 같은 조건부 합의까지는 아니지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계속 다가오셔서 우주의 권세자들에게 필요한 명령을 내려 자신을 구출해주시고, 대적들을 물리쳐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시편 기자는 본문 6절 이후, 이 구절이 끝나는 지점 바로 너머에서 나이가 들어도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주님, 제가 나이 들었다고 저를 버리거나 내팽개치지 말아 주십시오. 세상은 노인을 공경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그때에도 저를 계속 지켜 주실 것입니다!”
시편에서 이와 같은 감정은 전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사실, 이런 감정은 시편 곳곳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지속적인 찬양이 어떤 방법이나 모양이나 형태로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다는 기대를 대놓고 드러내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느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오픈 마이크 기도(open mic time of prayer) 시간에 앞으로 나와 이렇게 기도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 저는 계속해서 이곳에 나와서당신을 찬양하면서 헌금함에 헌금을 넣을 것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월가에서 진행 중인 큰 증권 거래에서 당신이 저를 위해 도와 주신다면, 제가 그렇게 하는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 하나님. 하나님, 저를 채권자들로부터 구해 주시고, 이 거래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셔서 제가 계속해서 당신을 찬양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 상황에서 이 기도를 듣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 그런 식으로 말하는것이 가능합니까? 그래야만 하는 것입니까?
시편 71편이나 시편에 나오는 다른 히브리 시들처럼 제가 비유한 것만큼 거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71편의 언어는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고백하고 말하고 기도하는 것, 즉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무조건 항복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과는 현저하게 다릅니다.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그에 대해 내가 불평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고, 예수님께도 모든 것에 대해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빚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제 찬양과 간증은 어떤 일이 있어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향한 저의 지속적인 찬양의 5%라도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해 주실 수 있는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구조를 위해 기도했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조차 그 때문에 하나님을 조금 덜 찬양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주는 것만으로도 저는 끔찍한 죄인일 것입니다.
시편을 남긴 대부분의 고대 히브리인들은 지금처럼 단추를 단정하게 채우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는 흔히 볼 수 없는 담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탄식하고, 불평하고, 애원하고, 협박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를 죽게 하신다면, 더 이상 찬양을 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성가대를 계속 하기 원하신다면, 저를 살려주십시오!”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기도에 있어서도 그러한 담대함과 과감함이 지나칠 수 있고, 남용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물 폭탄을 맞는 선수로 축소하는 나 우선주의(Me-First) 신앙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권리문화에서 이런 일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부유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주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거만한 신자들을 마주할 때면, 사람들에게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이미 은혜로 풍성하게 받은 헤아릴 수 없는 영적 풍요에 감사하고 다른 건강과 부에 대한 환상과 기대는 그만두라고 겸손하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금욕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시는 하나님과 정직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100%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지극히 인간적인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그 생명을 유지하고, 그 생명을 구하고, 때때로 그 삶에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하나님이신 그 분은,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에 대해 조금도 더 불쾌해 하지 않으십니다. 아이가 단지 음식을 차려 주고 위험한 때 자신을 보호해 줄 엄마 아빠를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실망하는 부모보다도 덜 실망하시는 것입니다.자녀가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것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생각을 잘 말해줍니다: 모든 것이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엄마 아빠는 늘 나를 위해 해줄 거야. 부모로부터 도움이나 구조, 보호에 대한 기대가 없는 아이들은 대개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했거나모든 희망을 꺾을 정도로 연속적으로 실망한 아이들입니다. 결코 건강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시편 71편은 너무나도 소심해진 기도생활에 활력을 주는 자극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기대거나 그분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좋은 관계는 늘 양방향입니다. 이 시편과 같은 시가 이를 상기시키는 데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신학교 때 저에게 구약을 가르치셨던 분은 John Stek 박사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시편을 가르실 때, C.S. 루이스도 지적한 것을 언급하셨는데, 많은 경우 하나님이 어느 정도 찬양 받기를 요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소 불쾌한 말이지 않습니까? 우리가칭찬 받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돌보고 있습니까? 지속적인 칭찬을 요구하는 것은 다소 헛되고 자기 중심적인일 아닌가요?
Stek 박사님은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전제 하에, 미혼모가 아들 Charlie를 부양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한다고 가정해 볼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녀는 Charlie에게 좋은 음식과 학교에서 입을 좋은 옷과 그에게 필요로 하고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기 위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사무실 건물 화장실을 청소했습니다. 그런데 Charlie가 배은망덕한 아이였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는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약간의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엄마에게 무례하게 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 엄마가 “Charlie, 나는 너에게 이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고, 네가 나에게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존경과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단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자식에게 그 작은 감사를 요구했다는 이유로,그녀를 허영심 많고 이기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찬양을 요구하실 수 있는 이유는 죄로 인해 우리가 Charlie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시는지 종종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는지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시편 71편에 대해 말씀드린 것처럼 건강한 관계 안에서는 자녀가 부모의 돌봄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고, 부모 입장에서도 자녀가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자녀가 그 돌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부모에게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시편 71:1-6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