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 주석

어떤 의미에서 시편 8편은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던지는 하나의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 같은 존재를 보실 수 있습니까?” 별빛을 가리는 빛 공해 따위는 없던 시절,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펼쳐진 광활한 별들 앞에서 시인은 자신이 우주의 먼지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아보고, 돌보시며, 심지어 사랑하기까지 하신다는 사실은 그의 상상력을 아득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땅 위에 위엄이 충만하시지만, 우리 인간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시편 기자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 놀라기는 일러요!” 사실 고대 이스라엘의 우주관을 보면, 그들은 평평한 땅 아래에는 물이 있고, 땅 위에는 투명한 유리 같은 돔, 즉 궁창이 있어 그 위에도 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태양은 낮 동안 이 궁창 위를 지나가다가 밤이 되면 땅 아래로 내려가 다시 원래의 출발선으로 되돌아간다고 여겼지요. 달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태양이 사실은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달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태양 빛을 반사하여 빛날 뿐이라는 사실도 전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별들은 어떨까요? 시인이 바라본 밤하늘의 별들은 분명 많고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우리가 속한 은하계가 저마다 행성을 거느린 수십억 개의 태양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개념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보았던 “별” 중 일부는 태양 빛을 반사하는 가까운 행성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훗날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늘의 몇몇 별이 다른 별들과 달리 규칙을 벗어나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방랑자”(그리스어로 planeo)라 불렀습니다. 그것들이 바로 우리가 아는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도 어떤 날에는 지평선 근처에서 수성을 어렴풋이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해왕성이나 천왕성은 맨눈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요컨대, 만약 시편 기자가 실제 우주의 광대함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자신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거의 황당할 정도로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 압도적인 규모 속에서 대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보실 수 있으며, 인간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요? 실제로 현대의 수많은 이들이 망원경과 천문학의 발전 이후 바로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설령 어딘가에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 먼지 같은 행성과 그 위에 사는 더 작은 존재인 우리에게 어떻게 신경이나 쓸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 것은 그저 교만이요, 자기 위안이며, 오만일 뿐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시편 8편의 시인은 다른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자연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계시를 통해 알게 된 진리였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존재가 맞습니다. 이 모든 장엄한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고,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존재로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이런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거나, 밤하늘을 바라보며 증명하려 했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 계시를 통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진리를 주신다고 믿는다면, 비록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이를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외심을 더욱 깊어지게 만듭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온 창조 세계를 지으셨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의 작음을 아시고도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신학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장엄함을 찬양했지만, 동시에 그 하나님이 이토록 작은 우리를 눈여겨보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에서 더 깊은 감동과 찬양을 길어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친히 몸을 낮추신다는 생각은, 머리 위에서 빛나는 저 수많은 별들만큼이나 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렇기에 시편 8편의 처음과 끝에 반복되는 고백은 더욱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1절에서는 해와 달과 별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하지만, 마지막 절에 다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고백할 때에는 그 경이로움이 저 거대한 우주로부터 지극히 작은 우리로 옮겨옵니다. 즉, 보잘것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시고, 사랑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아홉 구절의 시에는 이토록 놀라운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는 장차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음 가운데로 친히 내려오시는 궁극적인 사건을 미리 보여줍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서로를 대할 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의 작음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주목하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신 그 은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예화 아이디어

설교학 수업에서 저는 설교뿐 아니라 모든 좋은 글쓰기에서도 매우 중요한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 (Show, Don’t Tell)”는 원칙을 늘 강조합니다. 얼마 전 시편 8편을 본문으로 설교를 작성한 한 학생을 지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우셨다”라는 구절을 다루면서, 청중에게 보여주지는 않고 계속 말로만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로 설명하려고만 했을 뿐,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주지 못한 채 그저 “우리는 영광과 존귀를 받았다”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그 표현이 우리의 목적과 소명을 가리킨다는 설명만 늘어놓을 뿐이었죠.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보여줄 것”을 제안했습니다:

몇 달 전 주님 품에 안긴 밀리센트 자매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밀리는 여러 면에서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특히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을 발견하는 눈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혼자 서 있는 사람, 또는 식사 자리에서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사람을 보면, 그녀는 친구들 곁을 떠나 그 사람에게 다가가 교제의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녀는 늘작은 사람들을 보았고, 그들이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느끼게 했습니다. 가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마치 그녀의 머리 위에 영광과 존귀의 관이 씌워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시편 8편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이 땅에서 그대로 본받는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쓴 사람의 생생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사람들’인 우리를 바라보시고, 사랑과 돌봄으로 우리를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교제 안으로 초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