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넷째 주일에 애가의 시편을 선택한다면, 시편에서 가장 대림절적이고 희망적인 부분을 포함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할것입니다. 그러나 RCL은 그렇게 하지 않고 시편 80편을 이미 7절에서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끝인 17절까지 계속했다면,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인자’에 대한 구절을 넣어, 온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주는 하나님의 선택과 보내심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대림절 넷째 주일에 이 시편을 설교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이시편의 끝 부분을 염두에 두고 어떻게든 설교에 포함시키세요.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언급을 건너뛰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한편, 여기에는 하나님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비추게 해달라는 간곡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간구가 참으로 간절한 것은, 이 시편이 유배지에서, 혹은 적어도 아론의 어떤 축복의 성취로 여호와의 얼굴이 자신들을 비추기는 커녕 사실상 외면당하고있다고 느꼈던 어떤 아프고 고통스러운 유배 이전 시기에 쓰여 졌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시편은 매우 전형적인애가 시입니다. 어둡고 비통한 이미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슬픔의 깊은 곳에서 쓴 시입니다.
요컨대, 이것은 크리스마스답지 않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누가복음 1장에 마리아의 “Magnificat”를 대신읽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적어도 세상의 부자와 권력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이 노래도 그리 유쾌한노래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그들의 완전한 굴욕, 말 그대로 빈손으로 보내질 것을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Magnificat는 애가의 시편은 아니지만 어두운 예언이 담겨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시편 80편과 누가복음 1장의 공통점은 위대하게 오실 메시아가 오시면 만물의 대반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권력 구조가 뒤집힐 것입니다. 아마도 시편 80편의 맥락을 포함하여 이스라엘과 가장 미천한 자들까지도 해방되어 곧바로 정상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 받은 그 분의 출현이 없다면 이스라엘은 여전히 길을 잃게 될 것입니다. 잘못된사람들이 계속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부당한 이득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면죄부를 받고 오히려 부를 늘릴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이를 제거하면 상황은 다소 어둡게 지속됩니다.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결정적인 개입을 제거하면 애가의 시편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노래가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숙고할 가치가 있는 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편 80편처럼 “주여,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니까?”라는 노래가 먼저 나오지 않고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들을 수 없습니다. 이전 세대의 신실한 사람들이 자비와 정의를 위해, 인생의 모든 잘못된 것들을 다시 바로잡아 달라고 부르짖지 않고는 “참 반가운 신도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대림절과 곧 다가올 성탄절은 앞서간 모든 이들의 어깨 위에,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의 짓밟힌 시신 위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적으로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수많은 순간에도 하나님과 함께함으로써 메시아의 도래를 위한 길을 닦은 모든 사람들 위에, 그리고 그들과함께 서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은 대림절과 성탄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사실입니다. 최근 몇 세기 동안 온갖 종류의 엉터리 전천년설과 다른 형태의 신학이 이스라엘에 대한 올바른 관점, 즉 오늘날의 세속 국가와 하나님의참 이스라엘, 즉 현재 교회를 혼동하여 많은 기독교계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게 될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시계를 예수의 탄생으로 다시 설정하고 그 이후부터는 기독교인만 그림에 포함시킵니다. 이스라엘은각주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구약성경에 대한 설교도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 모두가 새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유대 민족의 옛 이스라엘의 중요성이 단 1초도 약화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믿음의 어머니와 아버지이며, 현재 우리가 알고 믿는 모든 것의 선조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자 아버지이십니다. 이러한 성경적, 역사적 연속성은 대림절에 그리고 항상 깊이 감사해야 할 부분입니다.
물론 그 역사에는 이스라엘의 중대한 실패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새 이스라엘인 교회도 여러 번 실패의 시기가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가 자기 백성을 향해 타오르는 느낌, 죄로 인해 자기 백성의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하셔야 한다는 느낌은 우리 역사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이 대림절에 하나님의 얼굴이 참으로 우리에게 빛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에 신실하게 남아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의 얼굴이 지금 우리에게 비추는 것은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비추셨기때문입니다. 따라서 성탄절의 정점에 오래된 애가의 시편을 읽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은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덜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셔야 할 필요성이 성탄절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옛 이스라엘의 이야기였고,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는 새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우리가 구원받게 하소서.” 주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예화 아이디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엘리 위젤은 칼빈대학교의 “신앙과 글쓰기 축제”에서 한 연설에서 애가의 시편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소리치고 불평하는 데 필요한 분명한 용기와 배짱이 유대인의 정신과 영성의 전형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위젤은 유대인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하나님께 분노하고, 하나님께 대항할 수 있지만, 유대인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한 가지는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시편 80:1-7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