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4편 1-7 주석

캘빈 신학교 채플의 강단 위, 설교대 뒤쪽에는 중앙에 십자가가 있는 큰 유리창이 있습니다. 몇 해 전 봄학기 집중강좌 설교 수업을 채플에서 진행할 때, 우리는 모두 그 창 가장 위쪽, 십자가 꼭대기 부근 창틀에 커다란 뿔올빼미가 둥지를 튼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미 올빼미는 몇 마리 올빼미 새끼를 키우고 있었지요.

학생들이 수업 중 설교를 할 때면, 그 어미 올빼미가 특유의 머리 회전(올빼미만 할 수 있는!)을 하면서 아래를 내려다보곤 했습니다. 우리는 마치 해리포터 이야기 속 호그와트 마법학교에서 신학 교육을 받는 것 같다고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혹시 모르신다면, 해리포터 세계에서 올빼미는 편지와 정보를 전달하는 주요 수단이어서 학교 곳곳에 등장합니다.)

사실 그 장면이 우리에게 떠올려 주었어야 할 것은 바로 시편 84편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 성전 처마에 둥지를 튼 새들을 부러워합니다. 시편기자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저 새들은 참 복이 있다. 언제나 하나님의 집에 살 수 있으니,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그들은 이미 누리고 있다!”

시편 84편은 기술적으로는 120–134편에 나오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Songs of Ascent)에는 속하지 않지만, 분명히 순례자의 노래입니다. 이 시편은 성전에 도착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으로 가득합니다. 사실 시편기자는 순례가 일시적이라는 점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 안에 늘 거하고 싶어 합니다. 시어들은 강렬합니다. “사모하며, 쇠약하며, 간절히 바란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만약 이게 연애 시라면, 우리는 금세 이 연인이 사랑에 흠뻑 빠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사랑의 언어는 아가서의 연인들조차 긴장하게 만들 만큼 강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잠시 멈추어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 84편의 하나님 임재를 향한 열망, 성전에서 예배드리고자 하는 그 갈망을 우리 대부분이 공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언제 마지막으로 예배를 손꼽아 기다려 본 적이 있을까요? 토요일 밤, 다음 날 아침 예배가 기다려져서 잠을 설쳐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주일 아침 7시 반 알람이 울리면, 대개는 신음 소리를 내며 임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15분 더 잠을 자는 쪽에 가깝습니까?

그러나 시편 84편을 설교하려 한다면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더 이상 고대 이스라엘 성전 같은 단일한 예배처소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성전은 독특한 장소였고 이동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지상에서는 지성소 안, 언약궤 위 속죄소에 좌정하신 하나님께 국한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물리적 위치에 따라 하나님의 임재에 더 가까이 혹은 더 멀리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가까이 = 하나님 가까이, 예루살렘 멀리 = 하나님 멀리. 그래서 항상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오순절 사건은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 모두에게 민주화시켰습니다 (이번 주 구약 본문인 요엘 2장에 이미 예언된 바 있습니다). 신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임재는 우리에게 손톱과 살처럼 밀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구 어디에 있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거나 더 가까이 있다는 개념 자체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 말은 또한, 어떤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거룩하거나 덜 거룩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로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웅장하고 교황이 있는 곳이지만, 신학적으로는 결국 또 하나의 교회일 뿐입니다. 텍사스에 있는 내 사촌의 교회나, 미시간의 내 고향 교회나 모두 똑같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84편 기자처럼 “오직 특정한 한 성전에만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갈망을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시편 84편의 영적 정서는 우리와 다소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시편이 단지 역사적 호기심일 뿐이고 오늘날에는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 기자 처럼 주일 아침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성전으로 달려가지는 않더라도,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우리에게 경이로움의 원천이 됩니다. 물론 언제나 흥분과 전율 속에 살 수는 없습니다. 매 순간마다 설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결혼과도 같습니다. 가장 건강한 결혼에서도 초기의 두근거림과 설렘은 시간이 지나며 약해집니다. 과거 첫 데이트 외식에서 느꼈던 그 로맨틱한 감정을 결혼후 한참뒤 화요일 저녁 식탁에서 전날 남은 스파게티를 먹으면서는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결혼은 사랑의 본질적 음조(低音)를 평생 유지합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때때로 다시금 설렘이 밀려오는 순간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매번 교회에 갈 때마다 시편 기자 같은 열정을 억지로 재현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신 은혜는 우리의 삶 전체를 받쳐주는 낮은 음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나 말씀 선포, 성찬에 참여할 때 우리의 심장이 다시 뛰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이 새롭게 북받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매주일 아침마다 그렇지는 않아도,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한 반드시 그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놀라운 은혜의 순간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만약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조차 항상 하나님을 향한 강렬한 전율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생각이 더욱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말했듯,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가 없는 삶은 결국 ‘하나님 모양의 빈자리’를 안고 사는 것이며, 그 공허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 전까지 결코 충족될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도 영적 전율을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붙드는 많은 것들은 실제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습니다. 1980년대 로버트 벨라와 동료들의 저서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에서 이런 예가 소개됩니다. ‘쉘라’라는 한 여성은 자신에게 신앙 전통이 전혀 없었기에, 자기 내면에서 느낀 신적 감각을 숭배하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종교를 “쉘라이즘(Sheila-ism)”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는지, 하나님을 향한 시편 기자의 갈망과 같은 깊은 열정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쉘라와 함께하고 싶다”라며 그리워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