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6:11-17 주석

성경 전체가 아니더라도 시편에서는 자주 보게 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심으로 찬양을 받으시는 것 입니다. 시편 86편에서도 15절에 뚜렷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시편에서는 그것이 부분적으로만 찬양과 행복의 원천입니다. 전체적으로 왠지 요나서와 같은 느낌이 약간 있습니다.

물론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해 도망갔던 선지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그가 실패를 두려워 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공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도망쳤던 것입니다. 그 악랄한 니느웨 사람들이회개할 까봐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는 사람들의 회원 전용 클럽의 회원으로 초대하실 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우려데로 거친 풍랑과 거대한 바다 괴물을 거쳐 결국하나님이 요나를 니느웨로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요나의 설교는 성공적이었고 또한 하나님은 심판과 진노로 그들모두를 불사르실 원래 계획을 돌이키셨습니다.

요나는 그것에 대해 엄청난 분노를 느꼈고 하나님이 “요나야, 왜 얼굴을 찡그리고 있냐?” 라고 하실때 긍휼이 많고 노하기를더디하고 사랑이 풍부하신 명성에 대해 하나님께 대듭니다. 하나님이 한번 좀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멸해 주시기를 마음속으로 바랬던 과는 반대로, 하나님이 대신 돌이키셨기 때문입니다. “혹시 했는데 역시나, 그 인간들에게 잘 해주실 걸 알았다니까요.” 요나는 실망과 분노에 투덜거립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긍휼이 풍성”하심은 기독교인 집 벽에 걸려있는 격려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요나의 입술에 있는 불평이고 참소입니다. 거의 탄식과 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86편 15절에는 그 정도 까지의 분노가 담겨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전적으로 긍정적인표현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구절 바로 전에 자신의 삶을 망치려는 무자비한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최소한 이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보호를 요청하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시편 기자의 믿음이 입증되고 이 특정

그룹의위협이 멈추도록 하나님이 여기서 거룩한 능력을 발휘해 이 적들을 무력 진압해 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 86:15을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오 주님. 당신은 이 못된 녀석들에 대해서도 많이 참으시고 인내하심을 압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임을 압니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모든 것을 잠시 중단하고 이 사람들에 맞서주실 수 없으십니까? 저의 명예가 달려 있습니다. 그냥 거기에 앉아서 긍휼로 가득차 계시지만 말고 무언가 좀 해주세요!”

마음 속 깊이 요나가 알았고 이 시편 기자도 알았으며 우리 모두도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계시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으로 긍휼과 자비와 은혜로 충만하시다면; 이 하나님이 참으로 변함없는 사랑으로 풍성하시다면,이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동일하게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소식인 것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모든 구원과 용서를 가능케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수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제거한다면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신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자비와 긍휼이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주어질 때는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자비와 긍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가능성도 조금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거침없이 번성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조금 씁쓸해집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과 그들의 계획과 계략을 뒤엎는 무언가를 하시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약간의 거짓말을 할 때마다 곤경에 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권세 있는 사람들이 아무런 파문 없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볼 때 화가 납니다.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한 번이라도 그런 짓을 했다면 해고당하고, 평판이 나빠지고, 망했을텐데. 하지만 저기 저 녀석은 그런 일을 반복해서 하는데 더 승승장구 하는 것 같으니…, 하나님, 자비로우신 건 알지만 솔직히 이건 좀….”

아마도 시편 기자는 우리가 때때로 아는 것보다 이것을 조금 더 깊이 알고 있었나 봅니다 (또는 요나가 알고 있었던 것 보다더). 결국 11-12절에서 이 시편 기자는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을 일심으로 섬길 수 있는 마음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것은

시편 기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움이나 거룩한 삶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믿는자로 살아가기 위해 늘 인내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 필요한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럼에도, 그의 원수들이 아무 심판 없이 잘 사는 것을 볼 때. . . 그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모든 선하신 속성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공의를 집행 하시는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종종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의 말을 인용한 대사를 듣습니다. 특히 2020년 초에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살인 사건 이후 인종차별에 대한 경각심이 불처럼 일어났을때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호 (arc) 는 길고 정의를 향해 구부러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 말이 인용될 때 “길다”는 부분이 강조됩니다. 우리는 상황이 정의를 향해 구부러지기를바라지만 그 과정은 시간이 좀 걸립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의 마지막 행에서 비슷한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오 주님. 당신께서 일하고 계시는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때때로 여기 저기에 있는 표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믿음을 돈독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긍휼과 인내와 은혜의 풍성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모든 선하심이 때때로 하나님이 참으시지 않아도 괜찮을 사람들에 대해서도하나님이 참으심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따금, 여기저기서 그래도 상황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고무적인 표적들을 볼 수 있는 한 말입니다.

우리 설교자들이 해야 할 일들 중 하나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러한 표적들을 발견했을 때 그것들을 집중 조명하는 것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시고,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며, 결국 하나님이 만물의 왕이심을 선포하는 가운데 그것들을 집중조명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J.R.R. Tolkien의 ‘반지의 제왕’ 3부작 가운데 ‘반지 원정대’는 호빗 4명, 남자 2명, 엘프 1명, 난장이 1명, 마법사 1명으로구성되어 있습니다. 호빗 Frodo Baggins는 두렵고 사악한 반지의 힘이 제거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모르도르의 사악한 땅으로 반지를 운반해야 합니다. 그러나 원정 초기부터 이 원정대는 분열되고 호빗 중 두 명인 Frodo와 Sam은 나머지 그룹을떠나 몇 달 동안 사라집니다. 마법사 Gandalf와 다른 호빗, Pippin 및 Merri를 포함한 나머지 일행은 Sam과

Frodo가 어디에 있는지 또는 아직 살아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들의 행방을 전혀 알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아무런 소식도 없었고, 그들이 여전히 괜찮은지 반지를 운반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는지 아무런 표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Gandalf와 호빗 Pippin 이 최근 야생에서 Frodo와 Sam을 만나본 Faramir와 마주치는 멋진 순간이 있습니다. Faramir가 Pippin을 보았을 때 그의 눈이 반짝이면서Gandalf와 Pippin에게 최근에Frodo와 Sam이라는 두 명의 다른 호빗을 만났다는 말을 해줍니다. Pippin과 Gandalf에게 이것은 Frodo와 Sam이 아직 살아 있다는 몇 주 만에 첫 번째 표적입니다. 이 표적에 대한 Pippin의 얼굴 표정은 깊은 기쁨과 경이로움 중 하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따금 예수님이 역사하고 계시고 하나님 나라가 전진하고 있다는 표적을 접할 때 그럴 수 있습니다. 시편86편 끝에서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의 표적들이 올 때 우리의 기쁨은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