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2:1-4,12-15 주석

시편 92편의 5-11절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시편92편의 이 강해는 특정 부분을 분명 건너뛰는 RCL 본문들 중의 하나인데, 호기심 많은 성경 학습자는 왜 건너뛴 것인지 궁금해할 것입니다. 시편92편은 단번에 읽거나 설교하기에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편의 강해는 거의 절반을 삭제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더라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적용되는 동일한 이유입니다. 악인을 다루는 본문을 보지 않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는 민감한 부분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편92편의 저자가 이 강해가 지정한 여덟 구절과 삭제한 일곱 구절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어둡고 심판하는 구절을 고려하는 것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짧은 시편의 중간 부분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최선입니다.

물론 히브리 시편(그리고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는 평화의 왕을 따르는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고 자신의 것으로 택하지 말아야 할 민감한 정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저주 시편이 이에 대한 대표적 예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신약의 사도들(특히 로마서 12장 말미에서)은 죄의 모든 형벌을 예수님이 다 지셨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저주하거나 그들의 팔이나 이빨이 부러지기를 기도하거나 시편 저자들이 종종 적들에게 퍼부었던 다른 불쾌한 내용들은 지금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너희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참고로 여러분도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이 시편의 중간 부분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보거나 감사할 줄 모른다는 한탄이 먼저 나옵니다. 그런 다음에 현재로서는 악인들이 종종 아주 멋지게 번영하고 있다는 솔직한 인정이 있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앞서 나가는 방식은 안전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분명 현명한 삶의 방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평화를 훼손하기 때문에 영원히 번영하는 것이 아니라 반창조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며 피조세계가 새로워질 때 멸망할 것이라는 궁극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악인들은 창조주가 세우신 피조세계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지 않고 있으며 피조세계를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언젠가 회복된 창조세계에 남아서 누려야 하나요?

시인은 이 모든 것을 끝낸 후, 자신과 모든 의인들의 현재뿐만 아니라 영원한 운명을 고려하기 위해 돌아옵니다. 이 교독문이 악인의 궁극적인 운명을 건너뛸지라도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실 때 의인의 영예와 행복 묘사에 있어서 동전의 뒷면을 고려하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시인에게 이것은 정말 동전 하나에게 불과합니다. 악인들이 너무 자주 번영하는 세상에서 전혀 번영하지 못했던 의인의 회복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반대되는 운명을 고려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시인은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길을 믿지 않거나 따르지 않는 이들의 구원을 소망하거나 기도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이러한 정서가 시편92편의 저자와 같은 이들에게 낯설지 않을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원수들의 멸망이 아닌 구원을 위한 기도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환영받을만한 생각인지는 열린 질문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고를 한다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편집하려는 교독문의 시도를 좋아하지 않지만,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서도 때때로 편집하고 있지만, 그러한 편집의 이면에 복수의 언어로 너무 빨리 넘어가지 않도록 그리스도인들을 막으려는 의도가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이 생각하는 논리를 깊이 생각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언어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원수와 악인의 멸망을 보고 싶다는 욕망보다 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의 창조의 경이로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여서 그 경이로움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코끝을 결코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면서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지혜롭게 잘 사는 법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율법을 너무 사랑해서, 이 세상을 훼손하는 사람들, 이 세상의 도덕적 경계를 재배치하여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다는 것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수와 응징에 관한 본문을 다룰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현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예수님을 더 가까이 따르는 것이 이 교독문이 건너뛴 본문들을 살펴보는 이유인지 확인하는 것은 잘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길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님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열정이 너무 약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짓밟는 것을 보면서도 거룩한 분노를 하지 않거나 실망하지 않는다면, 다른 문제가 우리에게 있으며, 영적 진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시편92편의 첫 네 절과 마지막 4절이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을 찬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시편의 그다지 즐겁지 않은 중간 부분의 논리도 어느 정도는 명확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를 보고 우리의 입술을 깨물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세계와 하나님의 방식이 짓밟히는 것을 볼 때 이런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 안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는 한 설교에서 자신과 동생들이 어렸을 때 돌봐주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유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유모를 좋아했지만 유모는 약간 내성적이었고, 그들은 때론 유모가 자신들과 더 놀아주기를 바랐습니다. 어느날 아이들은 유모에게 함께 활동을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유모는 바바라와 동생들이 약간은 놀랄 정도로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유모는 아이들에게 코레용과 빈 종이를 꺼내서 자신만의 집을 그리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했고, 이층 집, 앞마당, 타이어 그네, 흰색 울타리를 멋지게 그렸습니다. 그러자 유모는 아이들에게 주황색과 빨간색 크레용으로 하늘에서부터 불이 내려와 멋진 집과 마당을 불태우는 모습을 그려보라고 재촉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너희에게 일어날 일이야.”

아이들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모의 표정을 보면, 언젠가 하늘에서 그런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는 기대에 큰 위안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