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이 지난 지금 시편을 읽다 보면—특히 시편 99편과 같은 본문을 읽다 보면—그 말들이 당시 외부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고 조금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을지를 잊기 쉽습니다. 그 이유는 이 시편에서 시인이 숨 막힐 정도로 크고 포괄적인 주장들을 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러나 이 주장들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볼 때, 우리는 우리의 시각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온 열방이 그의 거룩함 앞에서 떨며 엎드려야 할 정도의 우주적 권세와 장엄함을 지닌 왕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이 구절을 읽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우주의 경계를 넘어 높이 들리신 모습, 그리고 그곳에서 이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수십억 개의 은하와 수조 개의 별들을 붙들고 계신 우주적 왕의 모습으로 상상하곤 합니다.
하지만 잠깐만요. 시편 99편은 그런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인이 우리의 시선을 향하게 하는 곳은 그곳이 아닙니다. 시인은 우리를 시온산, 성전, 지성소, 언약궤, 그리고 그 언약궤 위에 놓인 두 그룹 천사 조각상으로 안내합니다. 시편 99편의 카메라는 계속해서 확대와 확대를 거듭하며 점점 더 작은 물체들로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결국 우리는 길이 약 130cm, 폭 약 80cm 정도 되는 직사각형 판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식탁보다도 작은 크기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이 여호와께서 좌정하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자리라고 말합니다.

이게 어떻게 사실일 수 있을까요?
고대 이스라엘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사실 “시온산”은 그저 큰 언덕에 불과합니다. 에베레스트처럼 높은 산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리고 이스라엘 자체도, 다윗과 솔로몬 시대라는 전성기를 통틀어 볼 때조차, 예루살렘과 그 중심에 놓인 성전까지 포함해도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목록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 7대 불가사의에는 바벨론의 공중정원,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 등이 있었습니다. 지성소와 그 안의 언약궤는 그 목록에 없었고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고대의 “세계 불가사의 관광 버스”는 그곳에 멈춰 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시편 99편과 같은 여러 시편들은, 시온산과 성전, 그리고 그 언약궤가 신학적으로는 온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라고 선언합니다. 외부인의 시선에서 보면, 이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주장이죠.
게다가 시인은 그 언약궤 위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왜 찬양해야 하는지를 덧붙여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거의 다 이스라엘 내부의 이야기입니다. 모세와 아론, 사무엘 이야기가 나오고,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시며 율법을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전부 이스라엘이라는 한 공동체 내부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매우 의미있는 이야기였겠지만, 솔직히 말해 인류 역사 전체의 스케일에서 보면 이는 마치 오클라호마주 작은 마을에 사는 스미스 가족의 집안 사가 2차 세계대전이나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스미스 가족의 집안사는 그 가족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겠지만, 역사라는 커다란 연못 안에서 볼 때 그것은 아주 작은 물고기에 불과한 것이죠.
요컨대, 우리가 시편 99편과 같은 시들의 원 역사적 배경을 간과할 때, 우리는 이 시들의 대담함을 놓쳐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21세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편을 설교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주 중요한 차원에서 이 시인의 주장이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주 만물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대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의 기초를 놓으셨고, 그 구원은 마침내 전 세계적—어쩌면 우주적—차원의 구원이 될 것이었습니다. 물론 외부인의 눈에는 초라한 “시온산”과 작은 상자 같은 언약궤가 그런 우주적 이야기에 중심이 된다는 것이 믿기 어렵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시편 99편이 세상의 기준으로 얼마나 대담한 말씀인지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늘 삶의 변두리와 작은 곳에서 그의 큰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 또한 다시 기쁨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성경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결국 이 초점은 더욱 작아집니다. 우리의 모든 소망이 거대한 로마 제국의 변두리에 살던 한 젊은 여인의 작은 자궁 안에서 자라던 하나의 기적적인 수정란에 집중되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파격적이고, 충격적이며, 기적적인 주장처럼 들리지 않는다면 … !!!
하나님은 매우 구체적이고, 매우 작고, 세상적으로는 보잘것없는 것들을 통해 가장 위대한 구원을 이루십니다. 결국 시편 99편이 찬양하는 모든 거룩함은 그 작은 미세한 수정란 안에 응축되었고, 그것은 다시 평범해 보이는 아기로 자랐으며, 또 나중에는 나사렛의 평범한 목수의 아들처럼 보이는 존재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대담한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는 인류가 들은 말 중 가장 참되고 소중한 말이거나, 아니면 완전한 허무맹랑한 말일 것입니다. 복음이 가진 이 구체성과 특수성은 중립 지대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경외와 놀라움 속에 무릎을 꿇고, 시편 99편과 함께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높이세…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거룩하시도다.”
예화 아이디어
하나님께서 작은 방식들, 구체적인 순간들, 우리 삶의 아주 세밀한 지점들 속에서 베푸시는 복을 찬양할 때, 우리는 월터 브루그만의 말대로 “또 다른 세계”의 증인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갇혀 살아가는 매우 좁은 경계를 터뜨리고 하나님께서 왕이신 더 넓은 세계를 선포하게 됩니다. 브루그만은 “찬양은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그 세계에 참여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체적인 역사하심을 찬양할 때,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거짓 신들—자기충족, 자가 구원, 인간 성취만을 신격화하는 삶, 모든 것을 운이나 노력의 결과로 돌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정하지 않는 세계관—에 맞서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찬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초월적 권능뿐 아니라 그분의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 또한 고백합니다.
C.S. 루이스는 우리가 지금은 다만 천상의 찬양 심포니를 위한 악기 조율만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공연에 가본 사람이라면 알 것입니다. 조율 시간에도 그 자체로 설렘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악기들이 복잡한 소리를 내는 가운데, 가끔 누군가가 곧 연주될 모차르트의 선율 몇 마디를 미리 연주합니다. 그 순간, 곧 듣게 될 진짜 음악으로 인해 가슴이 두근거리게 됩니다.
죄로 가득한 이 땅에서 우리는 아직 조율하는 단계에 있을 뿐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는 이 악기의 조율이 우리의 사명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조율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주위를 향해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의 하나님, 작은 것들의 주님, 우리의 일상의 주님을 찬양하는 이 노래에 참여하라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시편 99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