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택에 대해, 예를 들어 우리가 아침 식사로 오트밀을 먹는지 신선한 과일을 먹는지에 대해 얼마나 크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선택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관심이 신명기 30장을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이 예배자들이나 학생들과 더불어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 인간의 선택에 대해 탐구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어떤 종류의 인간의 선택에 대해 하나님이 관심을 갖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선택과 그렇지 않은 선택의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모세가 신명기 30장에서 근본적인 선택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는 그의 고별 설교의 마지막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히브리인들을 이끌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평탄치 않았던 여정의 끝인 약속의 땅 문턱에 서 있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택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광야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많은 선택을 했는데, 일부는 좋은 선택이었지만, 몇몇 선택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 선택 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거의 한 세대 연장시켰습니다. 모세의 선택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를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가나안 입구에서 모세는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신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명기 30:19)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구약 성경에서 인간이 ‘behar’(선택하다)라는 동사의 주어로 나오는 유일한 곳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선택은 하나님 몫입니다.
구약학자인 Terrence Fretheim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히브리인들에게 이 말을 했지만, 아마도 이 말이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포로 되게 하신 6세기의 히브리인들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미래는 그들의 조상 못지않게 불분명했습니다. 6세기의 히브리인들은 약속의 땅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일련의 비참한 선택들을 했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제안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조상들의 반응 못지 않았습니다.
Fretheim은 선택하라는 이 말이 하나님이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신 상황에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이미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것에 대해 응답하도록 그들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삶을 향해 “기대어” 살아감으로 이미 주어진 생명을 온전히 받을 수 있도록 초청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생명을 어떻게 그들이 가장 온전하게 선택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제 동료 Scott Hoezee는 이 율법을 약속의 땅에서의 삶 뿐만 아니라 창조 전반에 걸친 삶을 위한 “사용자 설명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하라고 하신 “생명”은 어떤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신명기 30:16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진정한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건전한 관계를 세워 나가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에 대해 만족하는 것과 같은 일을 통해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Fretheim이 지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생명은 육체적인 차원 이상의 것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에 따라 살지 않는 본질적인 면에서 죽은 사람의 가슴에서도 심장이 격렬하게 뛸 수 있습니다. 진정한 생명은 인간의 모든 부분이 건강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보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따라서 더 쉬울 수 있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17절 이후 구절들은 결과적으로 선택에 관한 것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모세는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계속되는 불순종은 이렇게 사망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삶은 이렇게 뭉개집니다. 결혼하지 않은 어떤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로 선택한 남편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렇습니다. 고의적으로 하나님과 부모를 욕되게 하는 자녀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이렇습니다. 고객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보다 이익을 택하는 강력한 기업이 살아남는 방식이 이렇습니다. 국민을 위해 빵과 버터 대신 군인과 총을 선택하는 것은 크고 작은 국가가 취하는 방식이 이렇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천 명의 자식을 두었더라도 죽음의 길입니다. 흩어진 가족 및 기타 관계. 파괴된 이웃과 직장. 전쟁하는 민족과 국가. 이 모든 것이 매우 활기차게 보일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죽은 것입니다.
물론 Hoezee가 신명기 30장을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으로 우리 중 누구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우리를 축복하시도록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 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구속 행위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을 지키는 것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완고하고 영구적인 방식으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만큼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인간의 진정한 번영은 하나님의 명령과 목적에 대한 신실한 순종에서만 발견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그러한 순종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이제와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점점 더 닮아가게 하십니다. 19절과 20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을 택하고 ..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붙잡으라”고 말합니다. 생명을 선택하면 더 큰 순종이 뒤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물론,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생명을 택했는지” 또는 “죽음을 택했는지” 보고하고 있지 않습니다. Fretheim는 이 부분의 결말이 열려 있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질문은 21세기에 이번 주일 렉셔너리에 할당 되어 있는 본문 말씀을 읽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모든 사람에게도 열린 체 남아 있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아이디어(2014년 2월 설교 주석에서)
Frederick Buechner와 다른 사람들이 관찰한 것처럼 “법”이라는 단어는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때로 법은 어떤 사람의 결정 방식을 반영합니다. 고속도로의 일정 구간에서 55 MPH로 운전하라는 표지판은 법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다소 임의적입니다. 전에는 45 MPH였는데 앞으로 교통 위원회에서 65 MPH로 올리겠다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여러분이 숲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 사냥꾼에게 접근 권한을 부여할지 말지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담벼락을 따라 “무단침입 금지/사냥 금지” 표지판을 붙여 놓거나 “허가를 받은 사냥꾼 허용”이라는 표지판을 붙여 놓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으며, 어느 쪽이든 여러분의 재산에 대한 것입니다. 속도 제한 및 무단침입 금지 표지판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법”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중력의 법칙’이나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말할 때 감지되는 또 다른 종류의 법이 있습니다. 이 법의식은 주어진 상황에서 사물이 어떻게 되거나 존재할 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사물이 얼마나 단순하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암시합니다. 원한다면 여러분이 중력의 법칙을 거역할 수 있습니다. 특정 법칙을 믿지 않기로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사다리 위에서 균형을 잃거나 망치를 왼쪽 발에 떨어뜨릴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의 법이 속도 제한 표지판과 같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그것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뛰어들어갈 수 있도록 결정하신 제 멋대로 된 농구대 같은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율법이 중력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사용자 설명서로 이러한 규칙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법은 사물의 존재 방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중력의 법칙을 존중한다면 우리는 인생을 훨씬 더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망치, 사다리, 계단, 절벽과 같은 것들의 가장자리에 있을 때, 중력이 상황에 따라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주신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샬롬이 가장 빠르고 쉽게 오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용자 설명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신명기 30:15-20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