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3-14 주석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고 즐겁게 지내라’고 만드신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유명한 철학은 여러가지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삶의 목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에 두신 이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플래밍 러틀리지 목사의 설교 중에 한 말이 이 문제에 대한 저의 생각을 자극했습니다. 러틀리지 목사가 말하기를, “미국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사회학적, 정치적, 심리적, 경험적, 민족주의적, 영적, 심지어 종교적으로 생각하지만, 신학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RCL이 이번 주일을 위한 서신서 공과로 지정한 본문보다 인간적 관점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한 해독제를 제공하는 성경 구절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2021년도 여름의 한가운데, 에베소서 1장은 예수님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삶의 목적에 대해 생각하도록 도와줍니다.

이 본문은 압도하는 웅장함을 담고 있는 성경 구절들 중 하나입니다. 이 본문은 또한 사도 바울을 거의 압도했을 것입니다. 한 동료의 말처럼, 에베소서 1장의 말씀은 마치 터진 풍선의 공기처럼, 무너진 댐 위로 쏟아지는 홍수처럼 바울에게서 터져나왔을 것입니다. 사실, 에베소서 1장은 원문에서 하나의 긴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심호흡을 깊게 한 다음, 거의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13 구절의 영광의 흐름을 소리내어 읽는 사람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에베소서 1장의 선포자들이 가장 크게 도전받는 것 중의 하나는 이 말씀이 어느 정도로 대단한지를 청중이 조금이나마 볼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창조 이전의 시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끝이라는 측량할 수 없는 시간으로 덮여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는” 시간의 충만함을 계획하셨다고 말합니다.

또한 사도는 거의 모든 것을 인간의 관점으로 보는 문화에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사물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이 장엄한 구절 전체를 관통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덟 번이나 “하나님/그분”은 문장의 주어입니다. “우리/너희”는 단지 네 문장의 주어일 뿐입니다. 그 중 세 문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수동적으로 받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네 번째 문장에서 우리는 이 모든 은혜를 받은 놀라운 결과들에 대해 읽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로 선택한 그들을 복 주시고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은혜를 아낌없이 주셨고, 복음의 비밀을 알려 주셨고,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에베소서1장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이 성경의 금광을 온전히 탐구하도록 청중을 인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20세기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들 중의 하나인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의심할 여지 없이 매료된 회중에게 6개월 동안 에베소서1장을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 주일 서신 공과를 25-40분 정도로 조금 더 짧게 선포하는 이들은 몇 가지 사항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많은 주석가들과 설교자들이 지적하듯이 이 본문은 거의 모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입양된 형제들을 하늘에 계신 창조주 아버지에게 연결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의 수단이자 목표이십니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가 렌 밴더 지가 “우주를 묶는 접착제”라고 부르는 분이심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청중과 선포자 모두를 수동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바울이 이 짧은 본문에서 8번이나 반복하고 있듯이 예수의 친구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과 우리가 받았거나 앞으로 받을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하나로 연결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영원의 신비로운 안개 속에서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통해 자신의 자녀 삼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고 비난받아 마땅한 자임을 아셨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1장이 온 세상을 위한 은혜의 찬송인 이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영적으로 어두운 모든 장소와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의 복음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음을 상기시켜줍니다. 또한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하셨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신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선택의 표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이들을 죄사함을 받은 자녀로 입양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도록 은혜롭게 허락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 때문에 하나님은 또한 그의 사랑을 받은 이들을 우리 구세주를 더욱 더 닮아가도록 다듬고 빚으십니다. 이러한 변화는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하나님이 입양하신 자녀들의 죄의 각질을 제거하기 위해 철사 브러쉬를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단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닮아가도록 변화시키려고 자신의 자녀로 삼지 않으셨음을 상기시켜줍니다. 하나님은 장래의 일에 대한 그의 계획 중 일부를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우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신비를 우리가 풀어야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드러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그가 온 세상과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사랑으로 연합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줍니다.

밴더 지가 지적하듯이, 에베소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과 죄와 죽음을 정복한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해 역사가 허무함으로 끝나지 않음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망각에서 헤매다가 소멸로 돌아가는 화학적 존재가 아님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외롭고 단절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장치로 끝나는 존재가 아님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통치 하에 두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들, 그의 자녀들 사이에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의 새 창조의 영광 속에서 주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그의 사랑과 연합, 평화와 온전함으로 모든 피조물을 하나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에베소서1장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그분의 자녀로 삼으셨으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임재 안에서 영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 시작하라고 초대합니다. 이번 주일 서신 공과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도’, 하나님의 ‘아들과 딸’ 그리고 하나님의 ‘소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 모두 다 하나님의 것임을 감동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은 12절과 14절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함”이라 언급하는 말씀처럼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택하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과 답은 이 목적을 멋지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최고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를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한 동료가 지적하듯이,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우리의 말과 행위로 주님을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산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항상 우리가 아닌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식에 맞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은 다른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격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입양하신 하나님의 선택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삶에서 그 선택을 인정할 수 있게 격려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닮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 안으로 이끄시기 위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예수님의 친구들을 적극적으로 격려해야 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몇 년 전에 시카고 트리뷴 칼럼니스트인 마이크 로이코는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인도로 여행을 떠났던 빌 말로리란 사람에 관해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실망한 말로리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브론 정유소 바깥에 붙어 있던 표지판을 보았는데, “여행할 때에는 우리에게 물어보세요”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브론 정유소에 들어갈 때마다 그는 직원에게 “저는 여행자인데,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고 물었습니다.

말로리는 때때로 “저는 신입 직원입니다” 또는 “저는 그것에 관해 지침서에서 어떤 것도 읽은 기억이 없네요” 란 답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경우, 그는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직원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말로리는 이 일로 인해 세브론 주유소 직원들 사이에서 유명해졌습니다. 결국 세브론 지점 관리자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질문을 종이에 적어 봉투에 담아 우편으로 본사에 보내라고 제안했습니다.

말로리가 그렇게 한 후 몇 주일 만에 그는 세브론 소비자 상담실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세브론 본사가 보낸 ‘인생의 목적’에 대한 답이 무엇이었느냐면, 회사 신용카드 발급을 위한 신청서였습니다.

로이코 이야기가 우리를 웃게 만들지만, 신용 카드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삶의 목적에 대한 좋은 은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크고, 더 좋고, 더 빠르고, 더 멋진 물건을 사기 위해 신용카드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가 더 깊이 갈망하는 것을 줄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