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7:1-14 주석

언뜻 보기에 이 유명한 마른 뼈 골짜기의 환상은 사순절 본문보다 부활절 본문처럼 보입니다.  만약 본문이 우리에게 마른 뼈로 가득 찬 계곡을 남겼다면 그것은 사순절 마지막 주간의 침울한 분위기에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흉한 뼈들이 기적적으로 살아 있는 몸들로 변형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제와 잘 맞는 내용 아닙니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아마도 이 희망의 어조는 우리가 사순절의 어둠 속으로 더 깊이 여행하며 십자가와 무덤에 다가갈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일수도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완전한 절망은 우리가 사순절의 참회 분위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느낄 수 있는 절망을 반영합니다. 우리 자신의 죄와 또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여정을 더 많이 묵상할 수록 우리는 더욱 이스라엘 처럼 말할 것입니다: “우리의 뼈가 마르고 우리의 소망이 사라졌구나;  우리는 끊어졌도다 (11절).”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 본문은 “죽음이나 생명이나…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안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도다.” 를 상기시켜줍니다. 우리가 사순절 여정을 계속하려면 그 희망의 어조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순절이 너무 어둡고 힘겹게 느껴집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에게 매우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새 왕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보았습니다. 행복하고 기쁨에 찬 기간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의 그 최고점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고 이스라엘은 퇴락해졌습니다. 에스겔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마지막 날과 포로 기간 동안 예언했습니다.

에스겔 자신은 597년 제1차 유다 포로 추방 때 바빌론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 후 11년 동안 그는 유다(에스겔 1-24장)와 주변 국가들(에스겔 25-32장)에게 우울하고 파멸적인 메시지를 전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완전히 불타버렸으며 두 번째 유다 포로들은 바빌론으로 추방되었고 다윗 왕조는 막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바벨론 포로들에게 전해지자, 에스겔은 세상에서 구속되고 완성된 하나님의 왕국으로서의 부흥, 회복, 영광스러운 미래와 같은 희망을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겔 33-48장). 우리의 본문은 아마도 가망 없는 백성에게 희망을 주는 절정의 예언일 것입니다. 생생한 이미지로 인해 가장 기억에 남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그 이미지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의 세계는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모든 것, 삶의 형태와 의미를 부여했던 모든 것, 즉 땅, 집, 재산, 거룩한 도시, 거룩한 성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들의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들에게 패배했습니다. 혹 그들의 하나님이 실제로 만왕이 주님이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하나님이 가장 어두운 시간에 그들을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여호와께서 그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시고 그들을 단번에 버리신 것이 아니었을까요?

사순절 기간동안 우리는 세상의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하나님의 긴 캠페인에 관련된 본문들을 살펴보며, 아담, 아브람, 모세, 다윗 등 많은이들을 구하고 대표하는 인물들을 접하였습니다. 혹 하나님께서 그 캠페인을 포기하셨고 더 이상 모든이들을 위한 한 인물은 더이상 없는 것일까요? 그의 백성과 함께한 여호와의 역사가 끝났것은 아닙니까? 확실히 그렇게 보이고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11절에서 그들의 절망을 듣습니다: “우리의 뼈가 마르고 우리의 소망이 사라졌구나;  우리는 끊어졌도다. ‘”

이 환상은 그들의 절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것을 파헤치면서 생생한 이미지를 관통하고 구성하는 두 가지 의미심장한 주제가 자주 사용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전능하신 주” 와 “여호와는 주 여호와이시므로 이스라엘의 마른 뼈에게 소망이 있느니라.” 그들이 그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버리지 아니하신 그들의 주이심을 알게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탄식을 들어 주십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영 (히브리어로 바람이라는 뜻의 ‘루아’로 본문 전체에 수차례 언급)이 에스겔에게 그들이 버림받은 느낌과 마른 뼈로 가득 찬 골짜기인 죽음에 대한 환상을 줍니다. 그곳은 죽음이 다스리는 곳이었습니다. 태양에 바짝 마른 이 뼈들에는 생명이 한 점도 없었고 살점도 없었습니다. 죽음의 계곡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심오하면서도 묘한 질문을 하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인간적으로 말하면 답은 분명히 아니오 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자연과 민족,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다스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세를 알고 있으므로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마른 뼈들, 마른 뼈 같은 나라, 모든 희망을 잃고 하나님과 단절된 느낌을 받는 나라에 새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은 말씀과 바람, 예언과 생기, 사람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기적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놀랍고 패러다임적입니다. 하나님은 새 생명을 직접 주실 수도 있었지만, 에스겔의 예언과 바람의 형태인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기로 하셨습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새 생명의 기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의 조합의 결과입니다. 설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사용하시든, 그 일을 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거듭 보았듯이 여기서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에스겔에게 예언하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뼈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겠다고 말씀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힘줄을 붙이며 뼈에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그 뼈대를 덮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이 새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에스겔이 예언하고 (이 단어가 6번 사용됨) 성령이 임하십니다 (루아라는 단어가 9번 사용됨). 그 결과 에스겔의 눈앞에 아주 이상하고 기괴하기까지 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뼈들이 덜거덕거리며 모입니다. 힘줄은 뼈와 뼈를 붙입니다. 살과 근육은 뼈대에 힘을 줍니다. 피부는 모든 골격을 덮습니다. 그래서 재구성된 몸들을 가지게 되지만 에스겔이 다시 예언하고 네 바람이 마른 뼈에 생명을 불어 넣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거대한 군대를 이루어 서게 됩니다.

이 비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약에서 약속되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보장된 육신의 부활에 대한 전조입니까? 적어도 이 환상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문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집”입니다. 이것은 종말의 개인의 부활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것입니다. 현재 그들은 바벨론의 무덤에 묻힌 마른 뼈처럼 죽은 느낌입니다 (하나님이 12절과 13절에서 어떻게 비유를 바꾸시는지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끔찍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났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과  단절했다고 생각하느냐?  자, 여기 약속과 함께 너희의 미래에 대한 그림이 있다.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희를 너희 땅에 정착하게 하겠다. 너희 마른 뼈가 약속의 땅에서 다시 살리라.”

“그때에 너희는 내가 주 여호와, 너희 언약의 하나님, 너희 주권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국가, 교회, 가족, 개인이 메마르고 천천히 죽어가고 있으며 이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궁금해 하는 절망적인 세상에서 전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지의 거대한 구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며, 희망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될 지 전혀 모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여전히 주님이시며, 여전히 언약을 지키시며, 여전히 창조세계와  나라들, 심지어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심을 알도록 도와줄 그림과 약속이 있습니다.

아니요, 이 구절은 이야기의 끝이 아닙니다. 어는 학자가 말했듯이,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언약 백성의 더럽혀짐으로 부터 물러나야 하는 때부터 그의 위대한 구속 계획의 절정에 이르기까지 세계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전개되는 것”의 일부입니다. 이 본문은 나사로의 다시 일어남과 예수님의 부활과 같이 신약에 선포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미래에 행하실 일들을 예상하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우리 모두가 부활한 몸으로 새 하늘 아래 새 땅에 설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포로생활 하던 이스라엘 과도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과거 가족들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친숙한 방법의 상실을 애도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상황에 있습니다. 다시 살아나는 마른 뼈들의 군대는 다소 다른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숨을 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을 품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반지의 제왕 삼부작에서 J.R.R. Tolkien은 Frodo Baggins와 그의 일행이 사악한 권력의 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탐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Elvish 왕국 Lothlerien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곳에서 Galadriel은 Frodo에게 사악한 Sauron에 대한 Elves들의 오랜 저항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땅을 조금씩 잃었지만, 그녀는 “세상의 긴 세월 동안 우리는 오랜 패배와 같은 힘겨운 싸움을 함께 싸워왔습니다.”라는 힘찬 말로 그를 격려합니다. 종종 그렇게 보입니다. 죄와 악과의 싸움은 심지어 우리 자신 안에서도 “오랜 패배” 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이 고대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깜짝 선물을 가지고 계십니다. Frodo와 그의 일행이 마침내 발견했던 것처럼 패배는 승리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유배자들과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주권적인 사랑이 죽음을 극복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